기획 완결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들

3·1운동·군자금 모금, 애국계몽운동 활동…일생을 조국 위해 헌신

입력 2017. 09. 1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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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여성독립운동가’에서 ‘서울여자경찰서장’이 된 안맥결


3·1운동 등 구금 고초 겪으면서도 숙부 안창호 옥바라지 챙겼으며

서울여자경찰서장 부임 뒤에도 애국 인재 양성 위해 헌신해

 

2017년 8월 15일 기준

여성독립유공자 서훈받은 이는 296명

독립운동가 증명 자료 부족으로 명예 회복 못하고 있는 사람 많아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거침없이 말했던 독립운동가 ‘안창호’. 그가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옆에서, 인근에서, 그리고 국내외에서 함께했던 남녀 애국 동지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잊혀진 여성독립운동가, 안맥결

내가 수녀님을 만난 것은 몇 년 전이다.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어머니의 명예를 인정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조카였던 어머니로부터 많은 일화를 들으며 자랐고 임시정부 관련 분들을 만난 기억이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어머니 ‘안맥결’은 현재 여성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2017년 8월 15일 기준 여성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이는 296명, 인정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 수는 2300여 명에 달한다. 그런데 그중에는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소명 자료가 부족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가 다수였다. 안맥결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안창호의 조카,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

안맥결(1901~1976)은 평남 강서군에서 부친 안치호(안창호의 형)와 모친 박치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배우려는 열의가 강했던 안맥결은 1916년 4월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다. 숭의여학교는 송죽결사대가 조직돼 3·1운동에서 여학생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곳인 만큼, 평양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과정에서 안맥결도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간 구금돼 모진 고문을 겪었다. 부친 안치호도 만세시위를 한 명목으로 1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한 이후에도 안맥결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으로 지목되자 일본 동경의 나카무라여자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국내로 복귀한 뒤에는 함북 보흥여고 사감으로 부임해 애국계몽운동의 현장에서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안맥결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갖춘 여성이었다. 1927년 9월 관서지방 탄포리 교회에서 열린 종교강연회에서 안맥결은 직접 단상에 올라 “무너진 집을 다시 건설하자”라는 주제로 울분을 쏟아내는 강연을 해 방청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당시 언론기사에 다루어질 만큼 안맥결의 열의는 대단했다.

그의 활동 중에서 지속적으로 해온 것은 군자금 모금활동이었다. 군자금 모금활동은 숭의여학교 재학 시절부터 고등학교 사감을 하는 동안 이어졌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연결책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비밀리에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육영사업을 전개했지만, 1936년 4월 군자금 조달 행적이 발각돼 다시 5개월간 구금되는 고초를 겪었다.

숙부였던 안창호와 안맥결의 인연은 더욱 깊다. 1932년 안창호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일본 경찰은 친척에게만 접근을 허용했다. 그때 급히 상경했던 안맥결은 신경통과 소화불량으로 쇠약해진 안창호의 몸을 챙기며 옥바라지를 했다.

이후 1938년부터 안창호가 운영하는 점진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안맥결은 한국애국부인회의 간부로도 활동하며 광복에 힘을 보탰다.


 



‘서울여자경찰서장’으로 헌신하다

광복이 되자 국내는 미 군정 시대를 맞이했다. 미 군정은 우선 민생치안 유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찰조직을 개편했는데, 그 과정에서 1946년 7월 1일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가 신설된다. 당시 서울과 부산·대구·인천 4개 도시에서 창설된 여자경찰서는 큰 주목을 받았다.

서울여자경찰서가 1947년 3월 1일 최초 개서돼 초대서장 양한나 총경에 이은 3대 경찰서장이 안맥결이다.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지역의 경찰서 근무를 거치며 경찰경력을 쌓았던 안맥결은 1952년에 서울여자경찰서장으로 부임한 뒤에도 치안국 보안계장, 경찰전문학교 교수 등을 두루 거치며 애국 인재 양성에 헌신했다. 여성독립운동가에서 여자경찰서장으로 일생을 조국에 바쳤던 안맥결, 그의 가슴에는 늘 애국심이 가득했다.



안맥결의 후손들은 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손자’ 로버트 안(앞줄 왼쪽 둘째)과 뜻깊은 상봉의 시간을 가졌다.   필자 제공

 

 

 

 

도산 안창호가(家)의 용기 있는 여성들

안맥결의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난 광복 72주년에 안창호의 손자인 로버트 안과 손자부 헬렌 안이 한국을 방문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드렸더니 안맥결 후손과 뜻깊은 상봉의 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는 안창호 외에도 안창호가(家) 여성의 활약은 대단했다. 흥사단 깃발을 재봉틀로 직접 만들었던 이혜련이 여성독립운동가 1세대였다면 독립정신을 계승한 2, 3세대는 근현대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안창호의 장녀 ‘안수산’은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1942년 ‘미 해군 장교’로 입대, 미 국가안보국(NSA)의 비밀정보분석요원으로 활약했고, ‘안맥결’도 부친 안치호와 함께 3·1운동과 군자금 모금활동, 여자경찰서장 등으로 활약하며 일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용기 있는 안창호가(家) 여성 ‘안맥결’을 통해 잊혀진 대한여성의 나라사랑을 떠올려 본다.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 / 부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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