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품서 상추쌈과 냉수 먹고 싶습니다”
장병 사기진작 위해 군사우편국 설립
육군 13곳·해군 5곳 야전우체국 설치
오래된 조사이긴 하지만, KBS가 1984년에 실시한 6·25 노래 선호도 조사를 보면 7위에 ‘향기 품은 군사우편’이 올라 있다. 1952년 발표된 이 노래는 전쟁 중 군사우편이 전선의 장병과 후방의 가족 친지를 이어주는 가교로서 국민들 마음에 애틋하고 소중하게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군사우편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중략)… 상추쌈과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가 먹고 싶습니다.”
1950년 무더웠던 여름, 포항 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학도병의 호주머니에서 발견된 ‘부치지 못한 어머니 전상서’의 일부분이다. 서울 용산에 위치한 전쟁기념관 2층 ‘6·25전쟁실 Ⅰ’ 한쪽 벽면 목판에 전문이 새겨져 있다. 펜 대신 총을 들고 참혹한 전쟁터로 나섰던 열일곱 소년 병사의 참된 용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편지는 고인이 이 편지를 쓴 다음 날 전사한 까닭에 부쳐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는 어떻게 장병들의 편지를 발송하고 받아볼 수 있었을까. 전쟁 초기 우편물이 모두 공식적인 ‘군사우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1950년 9월 22일,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내고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하던 이즈음에 부산에 최초의 야전우체국이 설립됐다. 그리고 군사우편이 생겨났다. 생사가 엇갈리는 전장에서 장병과 가족 사이의 연락이 끊기면 장병들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될 것을 우려, ‘사기진작’을 위해 국방부가 군사우편국 설립을 당시 체신부에 요청한 것이 군사우편의 효시가 됐다.
처음에는 대구의 육군중앙야전우체국과 부산의 해군중앙야전우체국을 비롯해 육군 13개, 해군 5개의 야전우체국을 설치했다. 직원은 체신부가 야전 우편요원을 선발해 소정의 훈련을 시킨 뒤 지정 부대로 배치, 일선 장병과 행동을 같이하도록 했다. 6·25전쟁 때 군사우체국에 근무하던 체신부 직원 3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기도 했다.
군사우편은 베트남전쟁 때 최전성기를 맞았다. 6·25전쟁 휴전 후 군사우편의 연간 이용량이 많아야 3000만 통이었지만 베트남 파병이 본격화된 1960년대 후반에는 5000만 통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당시 팀스피리트 한미연합훈련과 같은 대규모 야외기동훈련이 실시되면, 사단급 부대 지휘부를 따라 해당 부대의 군사우체국도 함께 야전으로 가 우편물을 수발하며 장병들에게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군사우체국은 여전하지만 오고 가는 우편물의 양과 질은 여전하지는 않다. 공중전화는 물론 인터넷과 휴대전화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손편지’ 같은 우편물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소대장이 호명하며 나눠주던 ‘군사우편’을 받던 그 반가움과 설렘이 지금은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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