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 남자현
19세 때 의병투쟁하던 남편 잃고
3·1만세운동으로 독립운동 투신
독립자금 모금·애국계몽에 열정
日 총독·대사 등 두 번의 암살 시도
불운과 밀정의 배신으로 실패 ‘분루’
임종 때도 ‘독립 염원’ 첫째 유언으로
‘만주벌 여걸’로 불렸던 여성! 가열한 독립운동, 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던 남자현은 1000만 관객으로 흥행을 일으켰던 영화 ‘암살’의 모델로 다시금 주목받았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남자현은 정말 총독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이었을까? 그의 독립활동 중에서 대표적인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남자현 밀고자, 드디어 유죄판결을 받다!
1949년 3월 29일 오후 3시30분. 형무관에게 이끌려 흰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법원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공기가 법원을 가득 채운 채 재판이 시작됐다. 그는 재판부를 향해 항변했다. “공산당을 잡은 나를 재판해? 나는 반공투사였고 애국자였다!” 그를 쳐다보는 방청객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웅성거리는 가운데 재판이 끝났고, 재판부는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피고 이종형은 일본 헌병의 앞잡이로서 … 공산당원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애국지사 50여 명을 체포, 그중에 17명을 학살했고 … 하얼빈의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밀고하여 옥사케 했다 … 이에 법원은 이종형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 드디어 남자현의 밀고자, 그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광복하면 ‘독립축하금’을 나라에 바쳐라
“30년 만주를 유일한 무대로 조선독립운동에 종사하던 남자현(여자)은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단식 9일 만인 지난 17일에 보석 출옥했다. 연일 단식을 계속한 결과 22일 상오 12시 반경에 당지 조선려관에서 영면하였다.”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7일 자-
김성삼(남자현의 아들)은 잡혀간 어머니 생각에 가슴을 졸이며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김성삼에게 일본 경찰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해서 병보석으로 석방됐으니 만주 적십자 병원으로 가라’는 연락이 왔다. 1933년 8월 22일이었다. 김성삼은 아들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정도였다. 남자현은 죽음을 직감했는지 나직이 말했다. “이제는 됐다. 조선인이 하는 여관으로 옮겨다오.” 하얼빈 지단가에 조선인 조씨가 운영하는 여관으로 자리를 옮기자, 남자현은 아들과 손자에게 감추어 둔 행낭을 내밀었다. 그 행낭에는 249원 80전이 들어 있었다.
“내 말을 남기건대, 이 돈 중에서 200원은 조선이 독립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을 바치도록 해라. 그리고 남은 돈 49원 80전의 절반은 손자를 공부시키는 데 쓰고, 나머지는 친정에 있는 손자를 찾아서 교육을 시켜라….”
행낭을 전하면서 남자현은 마지막 유언을 했다. 죽음이 임박했던 순간까지 조국 독립만을 염원했고, ‘독립축하금’을 부탁했던 남자현. 그는 1933년 8월 22일, 만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자 안중근’이라 불렸던 남자현
‘여자 안중근’으로도 불렸던 남자현에 관한 일화는 많다. 19세에 의병투쟁에서 남편을 잃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으로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는가…”라며 그는 3·1만세운동에 뛰어들었다. 서울 신촌에서 쪽 찐 머리에 한복을 입은 채 ‘대한독립선언서’를 배포했을 당시는 47세였다. 남편의 원수를 갚고 내 조국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독립운동을 시작하면서 만주 일대에서 독립자금을 모금, 여성의 구국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여자교육회와 관련 단체 20여 개를 조직했고, 민족정신 고취와 문맹 퇴치를 위한 애국계몽운동으로 여자권학회(女子勸學會)를 조직하며 50세를 넘겼다.
1920년 8월 29일 국치 기념대회에서 동포끼리 대립과 분열이 격화되자, 왼손 엄지손가락을 베어 써내려간 혈서를 들고 거침없는 소리로 통합을 강조했던 단지(斷指)사건의 주인공 남자현은 ‘독립계의 대모’ ‘세 손가락 여장군’으로도 불렸다.
영화 ‘암살’의 모델, 일본 총독 암살이 사실이었을까?
첫 번째 암살 시도는 일본 사이토 총독. 1927년 4월 그녀는 권총 한 자루와 탄환 8발을 들고 일본 사이토 총독 암살을 계획했다. 사이토 총독은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문화정치’란 미명하에 지식인을 변절시키고 역사를 왜곡해서 조선인의 정신적 근간을 뒤흔든 장본인이었다. 순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방문하는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앞서 청년 송학선이 마차에 탄 일본 고관 3명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으로 경계가 삼엄해지면서 눈물을 머금고 남자현은 사이토 총독 암살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암살 시도는 일본 전권대사. 만주국 수립 1주년이 되자, 일본은 자축행사로 들떠 있었다. 남자현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1933년 3월 1일 일본 전권대사를 처단하려고 준비했다. 거사를 앞두고 도외구도가 무송도사진관에서 동지들과 모여 최후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2월 27일 남자현은 거사 장소를 확인한 뒤, 노파로 분장하고 무기와 폭탄을 운반하기 위해 나섰다. 오후 4시 즈음 남자현은 무기와 폭탄이 든 과일 상자를 운반하기 위해 남강 길림가 4호 마기원 집 문 앞에 섰다. 상자를 들고 골목을 나서는 순간, 조선인 밀정의 발고(發告)로 숨어있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1933년 8월 27일 자 ‘조선중앙일보’에는 “부토 대장 모살범”이란 제목 아래 남자현의 순국 사실이 보도됐다. 남자현은 모살범이었나? 무장투쟁의 일선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독립운동가, 권총을 거침없이 손에 쥐었던 여성,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며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했던 남자현은 ‘여성 영웅’이었다.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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