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6·25전쟁의 진실과 비밀

나라를 지키는 것에 안보 이상의 가치는 없다

입력 2017. 05. 2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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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6·25는 역사인가 현실인가? (끝)


과거로 치부하기엔 아픈 상처 ‘6·25전쟁’

군인과 민간인의 희생… 이산가족 등 남은 이들의 고통

전쟁의 역사 딛고 민주화·산업화 일궈낸 위대한 민족

‘6·25전쟁의 교훈’ 되새기며 북핵·미사일 도발 대비해야

 



정전협정으로 6·25전쟁이 휴식 기간에 들어간 지 64년이 됐다. 참전세대는 여든의 나이를 훌쩍 넘겨 생존자가 그리 많지 않고 지금은 ‘전후 3세대’가 국가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과거’요, ‘역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콘텐츠 측면에서 깊게 들여다보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요, ‘현재진행형’이다.


 

 


자고 나면 점점 더 심각해지는 북한의 핵 위협! 한반도를 떠나 미국까지 위협하고 있으니 6·25의 끝은 과연 없는 것인가? 6·25는 우리 국민에게 역사의 ‘맥’이다. 전후 3세들이 잊고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6·25전쟁은 침략자인 북한이나 침략받은 남한 모두에 많은 희생자와 아픈 상처를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불행한 과거를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6·25를 잊고 살아가는 사이에 북한은 핵과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개발해 미 본토까지 위협하고 있다. 바야흐로 핵전쟁 시대가 올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위기는 상존한다고 해도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안보 현실은 너무나 급박하고 초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국군 13만여 명 전사·민간인도 수십만 명 희생

6·25전쟁은 3년1개월 동안 참으로 많은 희생을 가져왔다. 지나간 과거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뼈아픈 상흔이다. 국군 13만7899명이 전사, 45만여 명이 부상했으며, 2만4495명이 실종되고 8343명이 포로가 됐다. 민간인 피해도 상당했다. 사망 24만4663명, 학살 12만8963명, 부상 22만9625명, 피랍 8만4532명, 행방불명 30만3185명 등 총 99만968명이나 된다. 여기에 이산가족 500만 명을 합하면 무려 600여 만 명이 희생됐다. 어디 그뿐이랴. 전쟁고아가 10만 명, 전쟁미망인이 20만 명이나 발생했다.

북한군도 전사·부상·실종을 합하면 63만8000명이나 되고, 민간인 피해 200만 명을 포함하면 총 26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공군도 한국전선에 와서 전사 18만4130명, 부상 71만5870명, 실종 2만1800명 등 총 92만1800명이 희생됐다.



1951년 1월 5일, 서울을 등지고 남쪽으로 뻗친 1·4후퇴 피난민 대열.  연합뉴스

 

 

 

나라를 지킬 힘이 없으면 침략의 먹잇감이 된다

6·25전쟁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나라를 지킬 힘이 없으면 침략을 받아 먹잇감이 된다는 사실이다. 6·25전쟁은 북한 공산당의 불법 남침이었으므로 즉시 유엔의 제지를 받아 실패했고, 김일성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지른 침략자이자 역사의 죄인으로 규탄받았다. 또 6·25전쟁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국군과 유엔군이 공산군과 싸워 승리한 최초의 이념전쟁이다.

전쟁 지도부에서는 여러 가지 전략적인 구상과 계획을 갖고 대비했지만, 여러 분야에서 예측이 빗나가 희생이 많았다. 적에 대한 정보판단은 예측보다는 팩트가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맥아더는 전쟁영웅이고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은인이지만, 중공군의 최초 참전 보고를 믿지 않았고 또 과소평가함으로써 작전에 차질을 빚게 한 점은 과오로 남는다. 휴전회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공산 측에 많이 기만당함으로써 ‘공산군과는 어떤 협상도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 6·25전쟁의 진정한 영웅은 농촌에서 태어나 학교에 가본 적도 없이 영장 하나에 목숨을 걸고 최전선에서 싸우다 안개처럼 사라져간 이름 없는 용사들이다.

개전 초기 아군의 패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정보 보고를 무시한 육군본부 지휘부의 안일한 태도가 가장 크다. 분단의 책임은 김일성에게 있지만, 우익 인사들이 광복 후의 혼란한 정국에서도 나라 걱정보다는 개인 영달을 위해 파당 싸움만 하고 있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또한 공산당의 수법을 모르고 있던 많은 남쪽 인사들이 김일성이 제안한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에 올라갔다가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안보와 경제성장 동시에 이뤄내며 기적 써내려가

전후 우리의 성공에 기여한 정책들이 있다. 첫째, 반공이다. 6·25는 공산당(군)과의 전쟁이었으므로 반공은 우리 국민의 가장 중요한 정신 덕목이 됐다. 만약 반공을 소홀히 했다면 북한의 심리전에 밀려 벌써 적화통일됐을 것이다. 둘째, 안보와 경제를 동일선상에 놓고 ‘안보의 토대 위에 경제성장’이라는 투 트랙 기조를 일관되게 지킨 것이다. 그 결과 외환위기와 세계 경제불황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극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셋째, 한미동맹이다. 한미동맹은 이승만 대통령의 끈질긴 투쟁과 압력으로 얻어낸 한미상호방위조약(1953.8)의 부산물이다. 전문 6개 조, 단 한 페이지로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한국을 지키고 한미동맹으로 발전해 대한민국의 안보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국방, 경제, 교육,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국가발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만일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세계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넷째, 세계화의 성공이다. 세계가 우리를 주목한 지는 오래됐다. 19세기 이후 전쟁을 치른 수많은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분단국이면서도 가장 단기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모두 이룬 대단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역은 아시아를 뛰어넘어 세계로 확대됐다. 국가 신인도가 높아지고 국격이 상승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 IT산업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세계 최고 수준을 달리고 있다.



지금의 북핵 위기 현실로 이어지지 않길

2017년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북한의 핵전쟁 위기설로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집중된 가운데 미국의 사드(THAAD·종말단계고고도지역방어체계)가 들어오고 칼빈슨 항공모함 등 미국의 전략무기가 한국에 배치됐다. 4월 25일에는 북한이 원산에서 장사정포 300여 문이 총집결한 가운데 3000발의 포탄을 동해로 쏘며 무력시위를 했다. 위기상황임을 말해준다. 6·25를 상기하면서 역대 정권이 잘 대비해 왔다면 이런 사태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위기가 현실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는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6·25전쟁을 모르고 살아가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6·25전쟁을 결코 잊지 말자.’ ‘전쟁은 도둑처럼 한순간에 온다. 평화를 지키려면 전쟁에 대비하라.’ ‘나라를 지키는 데 안보 이상의 가치는 없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국군장병과 독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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