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6·25전쟁의 진실과 비밀

소련 비밀문서 공개 후 북침설 허구 명백해져

입력 2017. 04. 2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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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북침설의 허구


인도 학자 카루나카 굽타

1973년 남침유도설 주장

해주 점령설 근거로 제시

 

북침설 브루스 커밍스 교수

소련 비밀문서 공개된 후

“6·25는 남침” 입장 바꿔

 

 

남침의 선두에 선 북한 탱크.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이야기는 이제 논쟁의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1980년대 주사파들이 역사 왜곡으로 의식화되면서 이념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고, 그 영향을 받았다. 북한은 남침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북침설’을 주장해 왔으며 남쪽의 일부 젊은이들이 이에 세뇌됐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

 

남침유도설

북한은 남침을 하고도 첫날부터 대외선전기관을 통해 이승만 정부가 북한을 먼저 침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러 증거로 북침이 아니라 ‘남침’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남침유도설’을 들고 나왔다.

남침유도설은 우리 한국이 북한을 자극해 남침하도록 유도했다는 주장이다. 즉, 남한의 선제공격에 북한이 대응하면서 우발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게 됐다는 ‘가설’로서 1973년도에 인도의 ‘카루나카 굽타’라는 학자가 먼저 주장했다. 그 후 국내외 좌파 교수들 중 이를 따르는 학자들이 많이 나왔고, 1970년대 후반에는 주류를 이뤘다. 특히 미국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등 수정주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한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한 것처럼 인식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카루나카 굽타는 그 근거로 ‘해주 점령설’을 주장한다. 즉, 당시 옹진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7연대가 황해도 해주를 먼저 공격했으며, 북한은 방어 차원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는 가설이다. 이는 터무니없는 허구다. 1950년 6월 25일 17연대는 이미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궤멸 상태에 빠졌으며 공격은커녕 전·사상자(750명)를 처리하기에도 힘이 부족했다. 결국 병력의 절반을 잃고 26일 인천으로 철수했다.



북침설

북침설은 한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해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설이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에 해외 수정주의 학파들에 의해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인 학자가 시카고 대학의 진보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교수다. 그는 자신이 쓴 책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81 김자동 역)에서 이를 주장했다. 이 책이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면서 문제가 됐다.

커밍스 교수의 주장은 옹진반도 등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분쟁이 내전으로 발전해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며, 1950년 6월 25일 당일, 옹진반도에서 남한의 선제공격(북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허위로 밝혀졌다. 커밍스 교수는 2013년 6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면서 “한국전쟁은 북에 의한 남침”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북침설이 허구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전쟁에는 반드시 쌍방의 당사국이 있으므로 이론적 접근을 떠나 ‘상황적 접근’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고자 한다.

 

첫째 : 역사적 사실


① 만일 남쪽에서 먼저 선제공격했다면, 6월 25일 새벽에 초토화된 곳은 38선 북쪽의 북한군 진지여야 한다. 그런데 남쪽 진지만 초토화됐다.

②개전 첫날부터 피 흘리고 죽은 사람은 인민군이 아니라 국군이었다. 남쪽 병원은 전·사상자들로 가득 찼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거짓으로 설명하겠나?

③보따리를 짊어지고 피난 간 사람들은 모두 남쪽 사람들이다.

④북침하려면 탱크 등으로 중무장하고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우리 국군은 탱크도 없고 전투기도 없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탱크 242문, 전투기 100대, 폭격기 70대를 비롯한 211대의 항공기를 확보하고 남침했다.

⑤북침하려면 병력과 지휘관은 정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 부대가 외출·외박을 실시하고 지휘관은 육본에서 준비한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⑥남쪽에서 북침했다면 평양이 먼저 점령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했다.

⑦옹진에 있던 17연대가 해주를 선제공격했다고 주장하는데, 옹진에서는 6월 24일 밤 ‘군민 친선의 밤’ 행사가 열려 오후 10시까지 17연대 장병들과 군민들이 화합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밤이 깊어졌을 때 북한의 야포공격을 받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⑧한국이 북침했다면 소련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하고, 유엔에서 한국을 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엔은 북한을 규탄하고 유엔군을 한국에 파견했다.


둘째: 객관적 남침증거

① 북한의 동맹국인 유고슬라비아에서 간행된 1978년도 대백과사전에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군대가 38선을 넘어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발발했다”고 명시.

② 일본의 사회당 1977년, “조선전쟁은 북한의 ‘선공’으로 시작된 조선의 통일전쟁이다.”

③ 미국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950년 북한은 남한에 대해 ‘침략’을 감행했다.”

④ 흐루쇼프 회고록(1972),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승낙을 받아 ‘침공’한 남침전쟁이다.”

⑤ 특히 북한의 전쟁문서인 정찰명령 제1호와 전투명령 1호가 물적 증거로 남아 있다.

⑥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유성철의 증언: 남침계획은 소련의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가 러시아어로 작성(1950.5.29)하고, 자기가 한글로 번역해 사용했다고 증언.

⑦소련군이 작성한 선제타격 작전계획 지도를 1992년 연합통신이 러시아로부터 입수.

⑧1992년부터 러시아 교과서에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전쟁’이라고 기술.


셋째: 비밀문서의 공개


1993년 1월, 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소련의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북한에 의한 남침 사실이 드러났다,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은 이 비밀문서들을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본으로 전달했다. 미국의 비밀문서는 이보다 훨씬 전인 1974년부터 부분적으로 공개되다가 지금은 전면 공개하고 있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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