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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군사사_1967년 4월 12일 7사단, DMZ 침투 북한군에 최초 포격 격퇴

신인호

입력 2017. 04. 11   18:56
업데이트 2023. 04. 1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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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4월 12일, 北의 휴전선 침범

안개 낀 밤, 육군7사단 매복조에 발각

신속한 상황보고로 포병사격 시행

3명 이상 사살 “선제적 부대운영 덕”

 

1967년 4월 12일 밤, 육군7사단은 비무장지대(DMZ)에 무려 600발이 넘는 고폭탄·조명탄을 퍼부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날 밤 북한군은 휴전 후 최대 규모로 DMZ로 침투해 왔다. 이에 사단은 DMZ 매복조의 요청과 동시에 포탄을 퍼부어 북한군을 응징했다. 휴전 후 최대 도발에 대한 최초의 DMZ 포격 응징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육군7사단의 임무지역은 전군에서 가장 험준한 지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방일보 DB
육군7사단의 임무지역은 전군에서 가장 험준한 지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방일보 DB

 

“4월 12일 밤 군사분계선에서 남방으로 400m 떨어진 지점에서 약 40명에서 60명으로 구성된 북괴군 1개 소대와 유엔군 순찰대의 2시간여에 걸친 교전이 있었다. 이 교전은 한국군이 경비하고 있는 휴전선 남방 지점에서 벌어졌으며 이곳은 군사분계선이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지점이다. 적어도 3명의 북괴군 침입자가 죽었으며 한국군은 1명이 죽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우신문(국방일보의 전 이름) 1967년 4월 14일 자 1면에 실린 유엔군사령부의 공식 발표문 내용이다. 이에 앞서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는 13일 자에 ‘북괴군 또 침범 砲 쏘아 격퇴’ 제하의 1면 머리기사로 “12일 밤 11시5분경 중동부전선 안 군사분계선 표지판 0813호 부근에 한 떼의 북괴군 침입, 아군은 포사격으로 이를 격퇴했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14일 자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면서 이 도발이 “휴전 후 최대의 침범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사단은 경계 어려운 최악 지형으로 유명

4월 12일 밤, 부대 관할지역의 경계여건은 좋은 편이 못 됐다. 월광은 초승달 정도였다. 며칠간 30㎜가량의 비가 내린 데다 기온이 최저 2.6℃, 최고 14.6℃로서 일교차가 심해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안개가 깔렸다. 전방 시계는 200m 이하로, 불량했다.

 

육군7사단의 상승연대 수색중대 고해봉(당시 28세) 소위는 10명의 잠복조를 이끌고 군사분계선 남쪽 DMZ 매복작전에 들어갔다. 매복 지점은 후방의 사단 GP에서 관측이 어려운 길목이었다. 사단이 관할하고 있는 지역 대부분은 경계에 매우 어려운 지형들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해(1966년) 가을부터 휴전선에는 적의 침투 도발이 잦아졌다. 사단은 이틀 전인 10일 오후에도 휴전선 남쪽 한계선을 넘어 침입한 북괴 무장괴한 2명을 발견, 1명을 사살했었다. 이날 시간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후에 23시5분으로 발표). 매복조 김주원(당시 24세) 하사의 귀에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과 몇 m 앞에 3명의 형체가 느껴진 것이었다. “누구냐?” 소리에 그들이 멈칫하자 적군임을 알고 곧바로 사격을 가해 3명을 모두 사살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사살된 적들 뒤에서 총탄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침투한 적의 주력이었다. 치열한 총격이 오갔다. 단순한 침투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후 평가에 따르면, 적은 3개 제대로 전투 편성을 갖추고 3명의 정찰조를 앞세워 침투해 왔다. 60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보아 정찰이나 단순 침투가 아닌 아군 GP에 대한 기습조로 판단됐다.

 

“DMZ 피로 물들어 있었다” 증언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매복조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광탄을 쏘면서 무전기로 대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곧이어 포탄이 인근에 작렬하기 시작했다. 사단의 포병 지원사격은 상황이 보고되면서 이미 준비된 것. 3개 포병대대가 고폭탄 585발, 조명탄 87발을 쏟아부었다.

전과로 사살 4명, 기관총 1정을 획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살 4명은 정찰조에 의한 사살자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포탄 세례에 비해 뜻밖에 사상자가 적은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현장을 확인한 바로는 우리 쪽 비무장지대가 피로 물들어 있었으며, 저들이 시체와 총을 다 수습해 간 것으로 보인다는 증언(민병돈 장군/월간조선)이 있다.

이튿날인 4월 13일, 당시 사단장 정봉욱 소장은 적이 목표로 했을 사단의 GP를 찾았다. 정 장군은 적 GP를 향해 엄중한 경고 방송을 했다. “야간에 침투한 공비에 대해 아군 포병 사격으로 궤멸시켰으며, 재차 도발 시 적 GP와 사단 사령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사단의 전투태세는 닷새간 유지되었으며, 적의 추가 도발은 없었다. 이 전투의 공로로 전투에서 안타깝게 전사한 고 한창희 병장(추서 계급) 등 5명에게 화랑무공훈장, 6명에게 인헌무공훈장 등 대대적인 포상이 이뤄졌다.

포병훈련 등 선제적 운영이 주효

이 과정에서 어떻게 포병사격으로 적을 격퇴할 수 있었을까?

당시 상황을 판단해 봤을 때, 아군의 수적 열세와 시계 제한으로 인해 아군 GP에서는 대응사격이 제한되고 이에 따라 포병사격을 시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당시 정봉욱 사단장의 선제적 부대운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사단의 분석이다.

당시 군단장이었던 노재현(육군대장 예편, 2019년 별세) 전 국방부 장관은 이 같은 사단의 전과에 대한 평가를 글로 남겼다. 요약하면 첫째, 적의 침투를 조기에 식별하고 신속한 상황보고체계가 확립됐다. 둘째, 실전적인 전투준비태세 및 GOP 경계태세가 유지됐다. 셋째, 신속·정확한 포병사격이다. 

 

사단은 평소 사단장의 지휘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DMZ 일대 사격을 위한 추진진지 선정 및 점령절차 훈련 숙달, 포병 사격장 신축과 지속적인 포병사격 훈련 등 다양한 포병사격 훈련을 숙달한 상태였다. 야간에 포병부대를 이동시키고 실사격을 하게 할 정도라면 평소 포병부대 훈련 수준이 높았을 것으로 추론되며, 전술적 상황에 맞춰 고폭탄과 조명탄 사격이 원만하게 진행돼 적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 정봉욱 장군은 누구인가

 

육군7사단의 18대 사단장(1965.7.24~1967.7.15)을 지낸 정봉욱 장군은 1923년 북한에서 출생했다. 6·25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북한군 육군 포병 중좌로 다부동전투에서 부대와 함께 아군에 귀순했다. 국군 중령으로 재보직돼 많은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다. 7사단장 임기를 마치고는 육군3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해 호국간성의 요람이 될 ‘충성대’의 기반을 다졌다. 이어 육군 제2훈련소(현 육군훈련소) 소장으로서 정병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2018년 3월 별세. 

신인호 기자 < idmz@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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