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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일, 결사항전 외치다 무조건 항복

기사입력 2016. 06. 14   16:37

<45> 제2차 세계대전: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1945.8) (상)

美, 도쿄 등 대도시 무차별 폭격

日 정부 아비규환에도 항전 외쳐

 

1945년 8월 등장 신무기 원자폭탄

조속한 종전·미래의 공포 동시에

 

 


 

 


1945년 8월 6일과 9일은 인류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시간이 됐다. 바로 이날 일본의 군수공업 도시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Atomic Bomb)이 투하된 것이었다. 이로 인한 피해와 참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지만, 어찌 됐든 ‘가미카제’라는 자살특공대까지 동원하면서 결사항전을 외쳐온 일본은 곧바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종전 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들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어떠한 요인을 지지하든 간에 두 차례에 걸친 원자폭탄 공격이 일본 정부가 패배를 최종 자인(自認)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1945년 8월, 가공할 신무기의 등장은 조속한 종전과 미래의 공포를 동시에 가져다준 ‘야누스의 얼굴’과 같은 사건이었다.



역사적 배경

미드웨이 해전(1942.6)의 패배 이후 일본 해군은 전투력을 상실해 갔다. 태평양의 제해권을 되찾은 미군은 이제 일본 본토로 진격하려는 대장정에 즉각 돌입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남태평양의 섬들을 재탈환해야만 했다. 1943년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공세가 본격화됐다.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 중 일본군의 중요 군사기지와 특히 비행장이 있던 섬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일본군 수중에 있던 도서(島嶼) 간의 연결망을 끊기 위한 미군의 시도는 일명 ‘개구리 뜀뛰기’ 작전이라 불렸다.

그러나 엄청난 물량작전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진격은 매번 혈전의 연속이었다. 일본군은 항복을 최고의 수치로 여기면서 끝까지 저항했고, 심지어는 ‘옥쇄(玉碎)’라는 미명 아래 집단자살도 불사했기 때문이다. 과달카날 전투의 경우, 미군은 힘겹게 섬을 점령한 이후에도 무려 7차례나 이어진 일본군의 결사적인 재탈환 공격에 시달려야만 했다. 전투가 끝난 후 과달카날 만(灣)은 일본군의 시체로 뒤덮일 정도였다. 미군의 제해권 장악으로 군수물자 보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면서 일본군의 전투력은 크게 떨어졌다. 미군은 1943년 말경에는 길버트 제도를, 그리고 이듬해 전반기에는 마리아나 군도(群島) 및 괌 등을 수복하는 등 점차 일본 본토를 향해 나아갔다.

무엇보다도 양측 간에 가장 치열한 공방전은 이오(유황도) 섬(1945.2~3월)과 오키나와 섬(1945.4~6월)에서 벌어졌다. 일본의 저항 의지를 꺾을 의도로 1944년 말부터 직접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을 감행해온 미군으로서는 효과적인 작전수행을 위해서 본토에 근접한 두 섬을 확보하는 것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도 미군 B-29 폭격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이 섬들을 빼앗길 경우, 본토마저 치명타를 입을 수 있었기에 사력을 다해 방어했던 것이다. 미군은 1만8000명의 전사자와 5만4000명의 부상자라는 실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당연히 일본 측의 인명손실은 미군의 몇 곱절에 달했다.

무엇인가 해결 방법을 찾아야만 했는데, 이는 크게 두 방향으로 추진됐다.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대일전(對日戰)에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대내적으로는 신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얄타회담(1945.2)에서 스탈린으로부터 참전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후자의 달성 여부는 여전히 장담할 수 없었다.



전개 과정

1945년 8월 6일(히로시마)과 9일(나가사키)에 두 발의 원자폭탄이 투하돼 순식간에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본토 방어 결사항전을 외치던 일본 정부는 이로부터 1주일 후 무조건 항복했다. 물론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북만주로부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압박도 무시할 수 없으나, 무엇보다도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강요한 것은 전율할 신무기, 원자폭탄이었다.

당시 보통 일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 원자폭탄 투하는 어느 면에서는 새삼스러운 사건이 아니었다. 1943년 후반기 이래 특히 대도시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미군 폭격기의 공습과 그로 인한 등화관제 훈련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이다. 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에 대한 기습적인 공습으로 결과적으로는 미드웨이 해전 승리라는 성과를 맛본 미군은 이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 본토에 대한 직접 공습을 시도했다.

실제적으로 일본 본토 도시들에 대한 미 공군의 공습작전은 1944년 말에 이르러 본격화될 수 있었다. 1944년 8월 미 해군의 마리아나 군도 점령 성공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곳은 도쿄로부터 무려 2000㎞나 떨어져 있었으나, 이는 신형 B-29 폭격기가 공습할 수 있는 항속거리였다. 11월에 섬 내에 비행장이 완공되면서 일본 본토까지 한 번에 공습이 가능하게 됐다. 사실상 그 이전에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작전은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목숨을 담보한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1944년에 실전 배치된 미 공군의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는 항속거리도 길고 폭탄을 다량 적재할 수 있었으나,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해서는 멀리 인도에 있는 기지에서 출발해야만 하는 심각한 약점을 갖고 있었다.

1944년 11월 말, 도쿄 인근의 한 항공기 제작공장 공습을 시발로 일본 본토의 대도시들에 대한 야간 무차별 폭격이 본격화됐다. 이들 중 일본인들에게 끔찍한 충격을 준 사건은 1945년 3월 9일 밤에 감행된 수도 도쿄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었다. 약 300대의 B-29 폭격기가 출격, 3시간에 걸쳐 무려 50만 개에 달하는 소이탄을 목조건물로 빼곡한 도쿄 시내에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결과는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도쿄 전체 면적의 4분의 1에 달하는 총 41㎢ 지역이 불타고 8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후로도 미군 폭격기의 공습은 도쿄는 물론 나고야·고베·오사카 등 다른 도시들로 확대됐다. 이러한 지속적인 타격의 결과 1945년 7월경에 이르러 일본의 패배는 명백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거의 사망한 거나 진배없는 일본 정부가 계속하여 관 속에 드러눕기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조속한 종전을 위해 미군이 취할 수 있는 대책은 무엇일까? 우선, 일본 정부가 진정으로 굴복할 때까지 공습을 강화하고 해상봉쇄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다음으로, 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물론 치밀하게 수립된 침공계획도 마련돼 있었다. 최소한 100만 명으로 예상되는 미군의 인명피해를 과연 감내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이러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미리 예견된 것이기는 하지만) 혜성처럼 등장한 해결책이 바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신무기였던 원자폭탄의 사용이었다. 마침내 일본 정부는 두 발의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서야 두 손을 바짝 들고 말았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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