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내주교수의 세계사 속 전쟁과 무기

암호 해독·정보전의 힘… 미군의 ‘완승’

입력 2016. 05. 2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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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제2차 세계대전: 미드웨이 해전 (1942. 6. 4) (하)


1942년 6월 4일 하루 만에 결판

美 니미츠 제독, 일본군 암호 해독

접적전 敵 움직임 정확히 파악 ‘승리’

대형전함 지고 항공모함 시대 개막

 




● 무기와 무기체계

日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한 일본 해군의 주력은 누가 뭐래도 항공모함이었다. 일본 해군은 5척의 항모와 수십 척의 여타 함정들로 함대를 편성해 원정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은 세계 최강의 항공모함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항공기를 싣고 다니는 배가 필요했을까? 제1차 세계대전 후 항공기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이를 활용한 해전이 주목을 받게 됐다. 공중에서 지상을 공격한다는 본질적 이점 이외에도 어뢰를 탑재함으로써 대형 전함과도 겨룰 만한 능력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장은 항공기의 낮은 성능으로 인해 비행시간과 항속거리가 제한되다 보니 이를 싣고 공격지점까지 근접할 수 있는 함정이 필요하게 됐던 것이다.

배 갑판에서 대형 풍선을 띄워서 적을 공격하려는 시도는 19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항공모함의 모습이 구체화된 것은 20세기에 접어들어서였다. 이때 항공모함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함재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초기의 항공모함은 갑판에서 비행기를 이착륙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제1차 대전을 전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물 위에서 작동하는 항공기를 탑재한 ‘수상기 모함(seaplane carrier)’이었다. 함정에 설치된 크레인을 이용해 항공기를 물 위에 내리고 올리는 방식으로 운용됐다. 전쟁의 장기화로 해상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이 절실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바퀴 달린 항공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설비를 갖춘 함정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마침내 1921년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항공모함이 영국 해군에서 출현했다. 퓨리어스 함으로 명명된 이 최초의 항모는 이미 건조 중이던 순양함을 개조한 것이었다. 이에 뒤질세라 1922년 미 해군도 석탄운반선을 개조해 항공모함 랭글리 함을 진수했다. 애초부터 항공모함으로 설계돼 건조된 최초의 함정은 1922년 영국 기술진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진수된 호쇼 함이었다. 그 덕분에 일본은 세계 최초의 정통 항공모함 보유국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이로부터 20년 후에 일본 해군이 일단의 항공모함을 앞세워서 잠시나마 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처럼 무기체계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한 선견적인 태도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양차 대전 기간에 항공모함의 발전과 확산의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1922년 열강 간에 해군함정의 총톤수 규제에 합의한 ‘워싱턴조약’이었다. 예전에 해군력의 주축을 이룬 전함이나 순양함 등에 비해 아직 유아기에 있던 항공모함에 대한 규제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탓에 각국은 앞다퉈 건조 중이던 전함이나 순양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애초부터 항공모함으로 설계된 함정들이 각국에서 하나둘씩 등장하게 됐다. 개조식 항공모함의 경우, 원래 선박의 용도가 다르다 보니 항모로서의 기능 발휘를 제한하는 고장이 수시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항공모함·함재기 개발… 일본 약진

제2차 대전이 임박한 시점에 재차 항공모함 개발에 주력한 것은 일본이었다. 근본적으로 산업화가 앞서 있던 서구 열강에 비해 해군력이 열세였던 데다 설상가상으로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제약을 받아온 일본이 열세를 만회할 심산으로 집중한 분야가 바로 항공모함이었다. 1941년까지 2척의 항모를 더 건조한 일본은 마침내 1941년 12월 7일 총 6척의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예전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 대성공을 거뒀다. 여전히 전함을 해군력의 중추로 보던 통념을 깨고 항공모함과 항공기의 조합만으로 달성한 승리였다. 이러한 해군작전이 이후 반년 뒤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항공모함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무기는 바로 항공기(함재기)였다. 1930년대, 항공기 개발 분야에서 후발주자였던 일본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일본 해군은 군 엔지니어가 작성한 설계도에 따라 민간산업체가 항공기를 제작·생산하는 분업화의 길로 나아갔다. 1941년 진주만 기습 직전 무려 5000대에 달했던 일본군의 항공기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생산된 것이었다. 당대의 해군용 주력 항공기로 아이치사(社)의 D3A1 타입99 급강하 폭격기, 나카지마사의 B5N2 타입97 폭격기, 그리고 미쓰비시사의 G4M1 타입1 폭격기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 항공기 중 최고는 1940년 여름부터 실전 투입된 미쓰비시사의 A6M2 타입0 전투기(일명 ‘제로센’)이었다. 특히 긴 항속거리와 강력한 무장력(기체 앞에 장착된 7.7㎜ 기관포, 양익에 달려 있는 20㎜ 경대포)을 자랑한 제로센은 1943년경까지 동아시아 상공에서 ‘무적의 날개’로 군림했다.

항공모함에 탑재된 항공기, 즉 함재기들은 기관포, 폭탄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뢰(torpedo)로 무장했다. 1867년 영국인 공학자 화이트헤드가 압축공기로 자체 추진하는 어뢰를 처음 발명한 이래 제1차 대전을 통해 빠르게 개선됐다. 특히 1915년 8월 중순경 영국군 수상비행기가 공중투하 어뢰로 독일 함정을 격침하는 데 성공하면서 그동안 주로 잠수함 발사용으로만 국한돼 있던 어뢰의 활용 폭이 커졌다. 당시 일본은 사거리(1.6마일), 속도(42노트), 탄두 중량(330파운드) 등의 측면에서 세계적인 성능을 자랑한 타입91 어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함재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전함은 철판을 강화하고 함상에 대공포를 설치했으나 제공권을 장악한 항공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제 긴 역사를 통해 대양의 왕자로 군림했던 대형 전함의 시대가 끝나고 항공모함의 시대가 개막됐음을 미드웨이 해전은 분명하게 보여줬다.



● 의미와 교훈

일본이 해군력을 총동원해 시도한 미드웨이 점령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싱겁게도 역사적인 대결전은 1942년 6월 4일 단 하루 만에 결판이 나고 말았다. 결과는 불과 반년 전에 벌어진 진주만 공습과는 정반대로 미군의 완승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해전에서의 패배로 일본은 영토 팽창은커녕 막대한 물량으로 무장한 미국의 반격에 직면해야만 됐다. 가히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의 분수령이었다.

당시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일본 연합함대는 왜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졌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일본 해군의 공격계획을 미군이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일본군의 암호 해독에 성공한 덕분에 니미츠 제독은 접적(接敵) 이전에 일본 해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 해군의 선봉장이던 나구모 제독은 미드웨이 근해의 미군 동향에 대해 무지한 채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다. 이러한 실책은 전장 해역에 대한 일본군의 사전 정찰 소홀에서 연유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통신보안이야말로 경우에 따라서는 대규모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임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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