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제2차 세계대전 시크릿100선

연합군 포로들 1년간 102m 땅굴 파고 '대탈주'

김가영

입력 2015. 12. 1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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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땅굴 트롤리


1943년 영국 공군 부셸 편대장 주도

3개의 땅굴 9m깊이로 동시에 작업

침대 베드 보드를 버팀목으로 사용

폭 60㎝ 트롤리 이용 엎드려 작업

76명이 탈출 시도해서 3명만 성공

50명 살해되고 나머지는 수용소행

후에 영화 '대탈주'로도 만들어져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포로 탈출은 슈탈라크 루프트Ⅲ 수용소에서 두 차례 벌어졌던 탈출일 것이다. 이 수용소는 2차 대전 당시 독일 영토였지만 현재는 폴란드에 속하는 슐레지엔의 사강에 있었다.



슈탈라크 루프트Ⅲ는 연합군 공군 포로들을 수용하던 수용소 중 하나로 가장 규모가 컸다. 1만 명의 포로를 8㎞의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23만8000㎡에 달하는 지역에 수용했다. 포로들은 주로 영국 해군 항공단과 미 육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들이었다.

포로수용소는 두 가지 이유로 이곳으로 정해졌다. 첫째는 독일 점령 지역의 중간에 있어 만약 포로들이 탈출한다고 해도 스웨덴·스페인·스위스 같은 중립국으로 도망가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다. 둘째는 이 지역의 독특한 토양 때문이었다. 이곳은 토양이 모래흙으로 이뤄져 땅굴을 파면 쉽게 무너졌다. 게다가 땅 밑의 토양은 노란색이지만 지표면 흙은 회색이어서 땅굴을 판 흙을 밖으로 버리면 보초들 눈에 쉽게 띌 수밖에 없었다. 죄수복에 노란 얼룩이라도 묻으면 그 옷만 봐도 어디선가 땅굴을 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수용소 설계 자체가 땅굴을 파기 힘들게 돼 있었다. 포로들이 지내는 숙소를 지면으로부터 60㎝ 뜨게 만들어서 포로 숙소에서 땅굴을 파면 한눈에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이에 더해 수용소 주위에 얕은 깊이에서 나는 진동을 관측할 수 있는 지진계를 설치했다. 땅 파는 소리를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철통 같은 대비에도 불구하고 탈출 시도는 두 번에 걸쳐 이뤄졌다. 첫 번째 탈출은 1943년 10월 이뤄졌다. 이때 포로들은 나무로 만든 뜀틀을 이용해 땅굴 파는 작업을 들키지 않도록 했다. 뜀틀을 설치하고 일정한 시간마다 운동을 구실로 포로들이 뜀틀을 뛰고 착지해 지진계가 땅굴 파는 진동을 탐지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두 번째 탈출 시도는 1943년 봄 영국 공군 로저 부셸 편대장이 시작한 것으로 부셸은 3개의 땅굴을 길고 깊게 파기로 계획했다. 1개가 발각돼도 다른 땅굴로 탈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땅굴은 각각 '톰' '딕' '해리'라고 이름 붙여졌다. 200명 이상의 포로를 탈출시키기 위한 이 계획에서 숙소가 지면 위에 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도 마련됐다. 톰과 해리 2개의 땅굴 입구는 난로 밑을 파서 만든 것이다. 이 난로는 땅과 연결돼 있어서 땅굴 작업을 위장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땅굴 역시 세면장 배수조에서 굴을 파 내려갔다. 모든 땅굴은 지진계에 걸리지 않도록 하려고 지면으로부터 무려 9m 깊이까지 내려간 후 수평 작업이 이뤄졌다.



 

 


땅굴 지름은 0.6m였는데 이는 포로들의 침대 매트리스 밑에 있는 60㎝ 길이의 베드 보드를 버팀목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성인 남성이 겨우 엎드릴 수 있는 너비의 땅굴이었던 만큼 목제 철로가 땅굴에 설치됐다. 철로에는 작은 나무트럭과 트롤리(터널공사 현장에서 뚫은 흙을 운반하는 소형 차)를 놨다. 포로가 트롤리 위에 누우면 땅굴 중간중간에 있는 운반 거점에서 줄로 당겨 이동시켰다. 환기 시스템은 빈 우유갑을 연결한 후 땅굴 밑으로 넣고 배낭으로 주름 펌프를 만들어 설치했다.



치밀하게 준비했지만 난관이 많았다. 먼저 1개의 땅굴은 원래 예정된 탈출구 위치에 있던 숲을 없애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지으려는 포로수용소 당국의 계획이 알려지면서 어쩔 수 없이 중도에 작업을 중단했다. 또 톰이라고 이름 붙인 땅굴은 1943년 여름에 발각됐다. 결국, 모든 계획이 땅굴 해리에 집중돼 1944년 3월 마침내 총 길이 102m의 땅굴이 완성됐다. 하지만 탈출한 포로들은 땅굴을 통해 탈출하고 나서야 탈출구가 원래 계획했던 철조망에서 몇 m 뒤에 있는 숲까지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44년 3월 24일 밤 탈주가 시작됐고, 보초가 땅굴 탈출구를 발견하기 전까지 76명의 포로가 탈출했다. 그중 3명만 무사히 탈출했고 50명은 게슈타포에 의해 살해됐다. 나머지 포로들은 인근의 여러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때의 극적인 탈출은 '대탈주(Great Escape)'라고 일컬어지는데 훗날 스티븐 매퀸이 출연하는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1963년 개봉되기도 했다.




자료='2차 세계대전 시크릿 100선'

 

 

 

 

 



 

김가영 기자 < kky7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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