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제2차 세계대전 시크릿100선

내 고향, 내가 지킨다” 거리로 나선 시민들?

김가영

입력 2015. 11. 0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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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독일 국민돌격대


군 복무 안 되는 어리거나 나이 많은 남자 대상…완장으로 표시

부실한 무기 들고 동·서부 전선으로 보내져 큰 희생 치르기도“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이후 만성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은 1944년 하반기 연합군의 독일 본토 공략이 본격화되자 1944년 9월 25일 ‘국민돌격대’를 창설했다. 10월 18일에는 국민돌격대와 관련된 법령을 발표했는데 히틀러는 이 날짜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날은 프로이센과 영국·폴란드·스웨덴·러시아 등으로 이뤄진 대(對)프랑스 동맹군이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을 상대로 승전한 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프로이센이 1806년 예나에서 프랑스에 대패한 치욕을 되갚은 중요한 전투였다.

 히틀러는 독일이 비록 2개의 전선에서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고전하고 있지만 결국 프로이센처럼 이길 것이라는 메시지를 국민돌격대 법령 제정일에 담았다. 국민돌격대도 라이프치히 전투 당시 나폴레옹과 싸우기 위해 소집된 프로이센의 국민군(주로 게릴라들)을 본떠 만든 조직이었다.

 하지만 1944년의 국민돌격대는 1813년의 국민군과 상당 부분 달랐다.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히틀러는 관방장관이자 자신의 개인비서였던 마틴 보르만에게 600만 명을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 숫자는 1944년 5월 당시 독일의 노동 인구 중 군 복무를 하고 있지 않은 남자가 600만 명 이상이라는 통계치를 바탕으로 산출된 것이었지만 국민돌격대는 이 숫자를 채우지는 못했다.

 국민돌격대의 기본 단위 부대는 16세에서 60세 사이 남자들로 이뤄진 대대였다. 16세 남자들은 히틀러 유겐트(나치 독일의 청소년단) 소속이었고, 나이 든 남자들은 대부분 이미 군 복무를 마친 퇴역 군인이거나 아니면 군 복무에 적당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국민돌격대와 국민군의 가장 큰 차이는 ‘지키는 대상’이었다. 처음 소집될 때만 해도 국민돌격대원들은 자신의 고향을 지킬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들이 연합군이 진격하는 동부와 서부 전선으로 보내졌다.

 거주지 안에 있던 국민돌격대는 지역 나치당의 통제를 받았지만 일단 부대에 배치받으면 군의 명령 아래 놓였다. 아무리 국민돌격대라 해도 전시 노동(군역)이 최우선 순위였기 때문에 이들은 고작 일요일마다 4시간씩 훈련을 받았다. 군복이 없으면 평상복에 챙이 좁은 중절모나 납작한 운동모를 착용하고 팔에 완장을 둘러 국민돌격대임을 표시했다.

 이들에게 주어진 무기와 탄환은 턱없이 부족했다. 가장 많이 사용하던 무기는 개인용 대전차 화기인 판저파우스트였다. 전쟁 막바지 몇 달 동안 독일이 생산한 ‘국민돌격소총’도 사용했다. 이 총은 대부분 조잡하게 만든 수동 노리쇠식 소총이었고 일부는 탄창조차 없어 한 발을 발사한 후 새 탄환을 손으로 일일이 장전해야 했다. 일반적인 군인에 비해 나이가 어리거나 아니면 많은 데다 체계적인 훈련도 받지 못했고 무기마저 부실했던 국민돌격대는 전선에서 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가장 효과적으로 운영됐던 국민돌격대는 동프로이센에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이곳은 이미 한 세기 전에 국민군이 만들어졌던 곳이기 때문에 국민군의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일차적인 요인이 있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붉은 군대로부터 가장 먼저 위협받은 독일의 동쪽 지역을 기반으로 한다는 지리적 특성도 작용했다.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려 애썼던 동프로이센의 국민돌격대는 그 어떤 지역의 국민돌격대보다 격렬하게 저항하며 전투력을 발휘한 것이다. 반면 체계적인 훈련도, 제대로 된 무기도 받지 못한 국민돌격대는 총알받이 역할을 하며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야 했다.

자료=‘2차 세계대전 시크릿 100선’



 

김가영 기자 < k2ykim@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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