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야기로 풀어 쓴 북한사

발각되었거나 혹은 덫에 걸렸거나, 그들의 거사는 이용당했다

입력 2015. 06. 05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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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군부 쿠데타


소련 군사대학 유학생들 1992년 김일성 부자 제거 시도 실패       

1995년엔 6군단 소속 정치위원·장교들 쿠데타 모의 수포로       

두 사건 모두 “김정일이 통제 강화 위해 포장했다” 주장 제기

 


 

 ■김정은의 공포정치와 군부

 최근 북한 김정은이 우리의 국방장관 격인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언론은 김정은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군부 쿠데타 등 급변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북한 군부의 쿠데타 모의 등 반체제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알려진 바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반체제 활동은 1990년대에 많이 발생했으며 일본의 한 연구자는 25회 정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체제의 폐쇄성으로 인해 ‘사실 확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북한 연구는 ‘학문의 영역’과 ‘정보의 영역’이 혼합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북한 군부의 쿠데타 시도 중 비교적 많이 알려진 것은 이른바 ‘프룬제 사건’과 ‘6군단 사건’인데 오늘은 이 두 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프룬제 사건과 6군단 사건

 프룬제는 소련의 군인이자 군사이론가였던 프룬제(M.V.Frunze)의 이름을 딴 소련의 군사대학이다. 북한은 이 학교에 엘리트 군인들을 유학 보냈고 이들은 귀국 후 북한군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프룬제 사건이란 이 학교 유학생 출신 중 일부가 김일성 부자를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한 사건이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했다.

 이 사건의 내막은 북한 강성산 전 총리의 사위였던 강명도 씨에 의해 알려졌다. 강씨는 1994년 7월 국내에 입국한 직후 출간한 회고록에서 사건의 전모를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사건의 주도자는 당시 북한군 부총참모장이던 안종호였다. 안종호는 프룬제 출신으로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군인들을 규합, 1992년 4월 25일 북한군 창건 60주년 열병식을 기점으로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의 계획은 열병식에 참가할 탱크에 실제 포탄을 장착해 귀빈석(주석단)으로 발사, 주요 요인들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강씨는 거사 날짜를 따서 이 사건을 ‘4·25 쿠데타’라고 불렀다.

 이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김정일이 능력이 부족한데도 김일성의 후계자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고, 둘째는 당시 소련 붕괴와 한소수교에 대해 북한이 소련을 비난하자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체제에 대한 반감과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거사에는 40여 명의 프룬제 출신 장교들이 가담했다고 한다.

 이들의 계획은 3단계였다. 1단계는 열병식장에서 탱크를 이용해 김일성 부자와 요인들을 살해, 2단계는 인민무력부 상황실을 점거해 군통제권을 장악, 3단계는 국가보위부·사회안전부·노동당 청사·중앙방송국·노동신문사 등 주요 거점 접수 및 비상계엄 선포였다. 그리고 새 인물을 혁명지도자로 내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 경호부대인 호위사령부를 봉쇄하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처음부터 엇나갔다. 프룬제 출신이 책임자로 있던 평양방어사령부 예하부대의 탱크를 열병식에 참석시키려 했지만, 인민무력부의 반대로 다른 부대의 탱크가 동원된 것이다. 결국 시작도 못 해보고 거사는 없던 일이 돼 버렸다.

 그러나 묻힐 것 같았던 이들의 거사는 엉뚱한 곳에서 발각됐다. 1993년 3월경 북한을 방문한 구소련 KGB 요원이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요원과의 술자리에서 안종호의 안부를 물은 것이 발단이었다. KGB는 프룬제 출신들의 거사 계획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술자리에서 뒤늦게 쿠데타 계획이 알려졌고, 김정일은 이들을 숙청했다.

 프룬제 사건 이후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95년 초 ‘6군단 사건’이 일어났다. 함경북도 청진에 위치한 6군단 소속 정치위원과 소속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사건이다.

 탈북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쿠데타를 모의한 측의 계획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6군단이 특공대를 조직해 평양에 직접 잠입해 김정일을 암살하고 주요 기관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6군단이 단독으로 평양을 장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한국군 및 미군을 나진항으로 끌어들여 후방 전 지역을 확보한 뒤, 6군단이 특공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들어가 지휘계통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전에 발각돼 실패했고 관련자들은 숙청당했다.




 ■사건에 대한 다른 주장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 두 사건이 실제로는 쿠데타 모의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김정일이 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다른 사안을 쿠데타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다. 먼저 프룬제 사건은 소련에 유학했던 군인과 학생에 대한 숙청이었다고 한다. 소련은 북한을 자신들의 영향 아래 두기 위해 자국에 유학한 군 간부를 일부 포섭했는데, 이들을 활용하기도 전에 나라가 붕괴해 버렸다는 것이다. 소련 붕괴 후 일부 KGB 요원이 이 같은 사실을 북한에 넘겼고 북한은 이 자료를 토대로 소련 유학생 출신들을 숙청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숙청의 명분으로 만들어 낸 것이 쿠데타 모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이 있을 무렵 상당수의 소련 유학 군인들과 유학생들이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6군단 사건도 쿠데타가 아니라 군 간부들의 부정 사건이라고 한다. 1995년 10월 총참모장에 오르게 되는 김영춘이 1994년 6군단장에 임명됐는데 간부들의 부패가 심각해 제대로 지휘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1차로 군단 내부 검열을 벌였고 이어 1995년 3월에는 국가안전보위부와 노동당 군사부가 합동 검열을 진행해 관련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 과정에서 군단 정치위원과 예하부대장 등이 처형됐고, 대대장 이상 군관은 전원 제대 또는 타 부대로 이동 조치됐다. 결국 김정일이 군을 숙청하기 위해 6군단에 쿠데타 사건을 덧씌웠다는 것이다.



 ■섣부른 예단은 금물

 1989년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시민의 편에 선 군대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또 같은 해 동독의 체제 붕괴 과정에선 체제 보위의 핵심세력이던 동독군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시 북한은 이 같은 동유럽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조사단을 보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영상을 찍어와 간부들을 교육하며, 향후 북한에서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것에 대비했다고 한다.

 프룬제 사건이나 6군단 사건이 일어난 것은 이 같은 동유럽 상황이 있은 이후였다.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전망도 본격적으로 제기되던 때였다. 이들 사건의 실체가 군사 쿠데타였는지 아니면 다른 사안이 쿠데타로 포장됐는지는 명확히 확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이 북한이 직면했던 당시 국내외 상황에서 김정일의 군 통제를 강화하는 계기로 활용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최근 북한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 더 나아가 ‘북한 붕괴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북한 체제의 핵심 세력인 군부의 움직임은 당연히 주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들이 나도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섣부른 예단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북한 내부의 변화에 대한 냉철하고도 면밀한 분석, 그리고 치밀한 대책이 필요할 듯싶다.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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