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허중권교수의 고대전쟁사

신라의 장거리 공격용 무기 당나라, ‘군침’ 삼키다

입력 2015. 06. 0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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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고대 무기체계(Ⅳ) - 쇠뇌


방아쇠 장치 사용해 쏘는 활

최대 사거리 800m…위력 막강

당, 자국 무기체계 도입 시도

신라, 타국 기술력 유출 막아

 

670~671년 당의 수도 장안(長安)의 활터에서 ‘신라 쇠뇌(新羅弩)’의 제작 평가회가 두 차례 열렸다. 이 행사는 당의 고종 황제가 직접 주관할 정도로 당에서 비상한 관심을 기울인 행사였다.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법. 그렇다면 왜 당나라의 수도에서 신라 쇠뇌의 제작 평가회가 열렸던 것일까? 한국 고대의 무기-쇠뇌(弩·노)에 대해 알아보면서 이 의문을 풀어보도록 하자.


 




 ‘삼국사기’ 문무왕 9년(669)의 기록은 “당의 사신이 도착해 황제의 조서를 전하고, 쇠뇌 기술자(弩師) 사찬 구진천(仇珍川)과 함께 귀국했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에는 표현돼 있지 않으나 당은 사신을 보내 국서를 전하면서 쇠뇌 기술자를 보내 달라고 요구하고, 신라가 이 요구에 응해 사찬 구진천을 당에 보냈던 것 같다. 이것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이었던 당이 신라의 쇠뇌라는 무기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나당 양국은 연합군을 편성해 백제(660)와 고구려(668)를 공략해 멸망시켰다. 당시 나당연합군은 사비성과 평양성 공격을 포함한 크고 작은 여러 전투에서 연합작전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신라군과 당군은 각각 연합군의 무기체계와 각종 무기의 제원, 성능, 효과 및 제한사항 등 여러 가지 정보를 획득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당이 주목한 신라 무기는 쇠뇌(弩)였던 것이다.

 쇠뇌는 방아쇠 장치를 사용해 화살을 발사하는 활인데, 일반적인 활보다 화살을 더 멀리 보낼 수 있으며 위력도 훨씬 세다. 쇠뇌는 비(臂: 몸통자루), 익(翼: 활대), 기(機: 발사대), 현(弦: 활시위)으로 구성된다. 비는 사격할 때 손으로 잡는 부분인데 나무로 제작한다. 비에는 화살을 올려 놓기 적당하도록 움푹 파인 전조(箭槽)를 만든다. 익은 비 앞에 장착되는 활인데, 탄성이 있는 한 개의 나무 혹은 여러 겹의 대나무로 제작한다. 기는 현을 당기기 위한 장치로서 비의 뒷부분에 위치한다. 현은 모시로 만든 끈에 밀랍을 발라 사용했다.

 쇠뇌의 크기는 사용하는 병사의 신체에 따라 조금씩 상이했으나, 일반적으로 볼 때 비의 길이는 50~ 80㎝의 범위 내에서 제작됐고, 비에 대한 익의 비율은 1대1.2~1.5이며, 기의 길이는 9~15㎝였다.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에 쇠뇌의 최대 사거리가 800m나 됐다고 하나 인명을 살상할 수 있을 정도의 유효 사거리는 최대 사거리의 절반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한편 당나라의 쇠뇌 궁수는 멈춰 있는 목표물에 대해 350m 정도 거리를 두고 4발 중 2발을 명중시킬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항상 움직이고 있는 적을 조준해야 하므로 적과 15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접근했을 때 비로소 쇠뇌 공격을 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이제 다시 당의 수도 장안에서 벌어진 신라 쇠뇌 제작 평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당에 도착한 신라 쇠뇌 전문가 구진찬에게 쇠뇌(木弩)를 만들게 해 화살을 장전해 발사하니 사거리가 30보(步)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사용되던 도량형으로 1보는 약 135㎝였으므로 30보는 40m 정도 되는 거리였다. 이를 지켜본 당의 황제가 이렇게 물었다. “내가 듣기에 너희 나라에서 쇠뇌를 만들어 쏘면 1000보를 나간다고 하는데, 지금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이에 구진천이 대답한다. “재목이 좋지 못하여 그러합니다. 만약 신라에서 나무를 가져오면 원하시는 쇠뇌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황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재목을 구했는데, 신라에서는 대나마 복한(福漢)이라고 하는 자를 보내 나무를 바쳤다.

 그리하여 구진천이 신라에서 가지고 온 나무를 가지고 노를 만들어 화살을 쏘았는데, 이번에는 60보 나갔다. 이에 황제가 사거리가 예상한 것보다 짧은 이유를 물으니, 구진천이 “저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에 나무에 습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는 구진천이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무거운 벌을 주겠다고 협박했으나, 그는 끝내 자기의 재주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첫째 당시 당군이 사용하던 쇠뇌에 비해 신라의 쇠뇌가 성능이 우수했다는 것, 둘째 당이 신라 쇠뇌를 자국의 무기체계에 도입하고자 했다는 것, 셋째 백제 및 고구려 통합전쟁을 통해 당의 한반도 지배 의도를 간파하고 있던 신라가 자국 쇠뇌가 당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해했다는 것 등이라 하겠다.

 쇠뇌가 전투에 사용된 사례로는 신라 진흥왕 19년(558)에 나마 신득(身得)이 포(砲)와 노(弩)를 제작해 보고하자 그것들을 성 위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 문무왕 2년(662) 김유신 장군의 지휘 하에 평양 외곽의 당군에게 군량을 보급하고 복귀하던 신라군이 임진강 부근에서 추격해 오는 고구려군과 접전하면서 만노(萬弩)를 발사해 고구려 군대의 접근을 저지하고, 역습을 가해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는 6세기 초에 창설해 운용한 법당(法幢)이라고 하는 부대에 쇠뇌를 전문으로 다루는 전투원들을 두었는데, 문무왕 11년(671)에는 노당(弩幢)이라고 하는, 쇠뇌만을 전문으로 운용하는 특수부대를 분리 편성해 운용했다.

 한편 ‘수서’에는 평원왕 시기(580년대)에 고구려에서 수나라의 쇠뇌 기술자를 매수해 고구려로 데려간 사실이 언급돼 있다. 오랜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든 국가는 성능이 좋은 인접국 혹은 적대국의 무기를 어떻게든 구해서 자국의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한다는 군사적 진리를 말해주는 사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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