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야기로 풀어 쓴 북한사

지식인 숙청하고 도서 불살라…북한판 ‘분서갱유’

입력 2015. 05. 3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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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5·25교시


5·25교시 발표…지식인 탄압 기폭제 역할

충성심 강한 ‘신인텔리’ 중심 세대 교체

전국적 도서 검열…서양 문화·예술 척결

필요에 따라 통제·활용…이중적 정책 계속

 

 


 


 

  ■초기 북한의 지식인 우대 정책

 일반적인 공산당의 깃발처럼 북한 노동당 깃발에도 노동자와 농민을 상징하는 망치와 낫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북한은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망치와 낫 사이에 붓을 그려 넣은 것이다. 북한은 붓이 지식인을 상징한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은 왜 다른 공산당들과 달리 붓을 추가했을까? 이것은 북한이 노동당 창건 당시부터 노동자·농민과 함께 지식인을 ‘혁명의 주체’로 인정하고, 지식인을 당의 ‘구성성분’으로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노동자·농민만으로는 사회주의 건설의 복잡하고 어려운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현실적 문제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지식인을 ‘인텔리’라고도 부르는데, 북한이 말하는 인텔리는 ‘일정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지고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사회계층’으로 통상 ‘대학 졸업 정도의 문화기술 수준을 가진 자’를 말한다. 김정일도 인텔리를 ‘정신노동으로 사회적 부를 창조하는 근로자’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광복 직후 북한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지식인이 충분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교육의 기회가 제한됐을 뿐더러 그나마 있던 인물들도 공산주의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결국 북한은 부족한 지식인을 충원하기 위해 광복 이후부터 전쟁 기간까지 남측 지식인들을 계획적으로 북으로 데려갔다. 이에 따라 과학자·기술자·정치인·법조인·공무원·예술인·문학가·언론인·종교인 등 수많은 지식인들이 강제 납북됐다.

 

 ■1967년 김일성의 5·25교시 발표

 납북된 지식인들은 북한체제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북한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이들을 서서히 압박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탄압이 더욱 본격화됐다.

 1967년은 그 탄압이 절정으로 치닫는 해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에서 1967년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살아남았던 갑산파마저 숙청되면서 김일성 독재 체제가 본격화되는 해였다. 이런 기조 속에서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 또한 극에 달했던 것이다.

 지식인 탄압의 ‘근거’이자 기폭제가 된 것이 바로 5·25교시다. 5·25교시는 1967년 5월 25일 김일성이 발표한 교시를 말하는데,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현재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부 고위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일부 내용이 알려지긴 했지만, 그 내용은 각기 다르다. 황장엽은 5·25교시를 김일성이 당사상사업 부문 일꾼들 앞에서 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와 프로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김남식은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의 초본이라고 하고, 성혜랑은 반수정주의 투쟁, 좌경극단주의에 의한 반문화혁명이라 한다. 이에 대해 2007년 5월 노동신문은 5·25교시 40주년 기념사설을 실으며 5·25교시를 ‘당면한 당선전사업 방향에 대하여’라는 김일성 ‘노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이처럼 5·25교시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있다. 그러나 이 교시가 김일성의 유일독재체제가 본격화되는 출발점이자 북한사회, 특히 지식인 탄압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가정과 직장의 모든 책, 글자 하나까지 검열

 5·25교시는 북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일성 우상숭배가 강화되면서 주민들은 이후부터 김일성 휘장을 패용해야 했고,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 속에서 구속받게 되었다.

 그러나 5·25교시로 인한 변화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점은 북한판 ‘분서갱유(焚書坑儒)’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분서갱유란 중국 진시황제 때 서적을 불사르고 수많은 유생을 구덩이에 산 채로 묻어 죽인 사건을 말한다. 5·25교시 이후 북한에서도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수많은 도서를 불태우는 등 ‘비문명적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북한에서는 지식인을 ‘낡은(舊) 인텔리’와 ‘새(新) 인텔리’로 구분한다. 구인텔리는 일제 시기 교육을 받은 자로 실력은 있지만 사상성이 낮은 자고, 신인텔리는 사회주의하에서 교육받은 자들로 이른바 사회주의적 인텔리다. 신인텔리는 전문성 면에서는 구인텔리보다 못하지만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에서는 절대 우위에 있는 자들이다.

 5·25교시 이후 북한은 ‘인텔리의 혁명화’라는 구호 아래 구인텔리들을 신인텔리로 교체했다. 광복 이후 구인텔리에 대한 쓰임새가 다했던 것도 한 이유였다. 결국 이때부터는 사상으로 무장된 신인텔리가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전국적 규모의 ‘도서정리사업’도 시행됐다. 1970년대 중반까지 진행된 이 사업으로 전국의 모든 가정과 직장에서 보유하고 있는 책에 대해 페이지 하나, 글자 하나까지 검열이 이뤄졌다. 검열 기준은 수령우상화, 항일무장투쟁의 절대화, 계급투쟁 등 이른바 반수정주의·반부르주아 문화에 저촉되는가였다. 그 결과 수많은 도서가 불태워졌고, 오직 김일성 저작과 김일성 찬양의 정치서적만 남게 됐다.

 음악·미술·과학 부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외국 음악은 소련 노래까지도 금지됐고 서양화는 찢겨졌으며, 서양화 화가들은 지방으로 좌천됐다. 이때부터 북한에서는 유화가 자취를 감췄다. 베토벤 같은 고전 악보도 모두 불살라졌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실력보다는 사상으로 무장된 과학자들이 중용되기 시작했다. 자력갱생이라는 미명하에 외국기술 도입이 금지되면서 북한의 과학기술은 세계적 흐름과는 동떨어지기 시작했다. 또 각 분야에서 발행되던 학술지들도 이때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정간(停刊)조치 당했다.

 이에 대해 김정일의 처형(妻兄)이었던 성혜랑은 당시를 “사회전반에 극좌적인 바람이 불어닥쳤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그 결과 지식인들은 숙청되고, 평양에는 ‘촌뜨기’만 남아 북한은 ‘무지의 왕국’이 됐다고 했다.

 

 ■지식인 정책에 대한 이중성

 이처럼 북한은 광복 직후에는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지식인을 대우했지만, 그 필요가 다하는 순간 이들을 숙청했다. 그 결과 북한은 체제에 순응하는 ‘죽은 지식인 사회’가 돼버렸다.

 북한의 지식인 통제와 활용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북한은 1992년 12월 정권 수립 이후 처음으로 ‘전국지식인대회’를 개최했다. 소련 등 사회주의가 붕괴하자 ‘일부 나라에서 지식인들이 자본주의를 끌어들이는 반당·반국가 활동을 앞장서 벌였다’며 지식인들에 대한 사상교양사업을 한층 강화한 것이었다.

 2007년 11월에도 ‘전국지식인대회’를 개최했다. 1차 대회 이후 15년 만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전국 모든 지식인들이 노력할 것을 강조했다. 필요에 따라 지식인들을 통제하고, 때로는 ‘역사적 임무’를 부여하며 이들을 활용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쓰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은 자유로운 논쟁과 연구를 통해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계층이다. 그러나 북한처럼 지식인들을 억압하고, 북한의 선전처럼 지식인을 ‘당의 열렬한 옹호자, 방조자’로만 생각한다면 북한의 변화와 발전은 앞으로도 요원해 보인다.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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