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허중권교수의 고대전쟁사

길이 4m15㎝’ 말 위에서 휘두른 창은 삭

입력 2015. 05. 2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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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무기체계(Ⅱ) - 창


‘긴 나무막대에 칼날 붙인 게 기본 칼과 함께 근접전투서 많이 활용

고구려 벽화엔 활보다 많이 등장 전장서 강한 전투력 발휘 증명

신라, 창 운용 독립부대까지 편성

 

 

 우리나라의 고대 전쟁에 사용된 창은 모(矛)·삭( , ?)·과(戈)·극(戟)·창(槍) 등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돼 있다. 각 창의 특징과 전투에서의 사용 예를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모(矛)는 기다란 나무막대에 칼날을 가공해 붙인 무기다. ‘주례’ 동관고공기의 노인에 의하면 모의 자루 길이는 6척6촌인데, 주·춘추전국·진·한대의 도량형을 적용하면 1m50㎝ 정도 된다. 모는 부여 ·동옥저·마한 및 고구려의 무기를 소개하는 ‘후한서’ ‘삼국지’ ‘진서’ ‘양서’ ‘주서’ 등에 기록돼 있으나, 한국 고대의 전쟁 기록에서 이 모가 언급된 경우는 없다.

 다음은 삭( , ?: ‘집운[集韻]’에 따르면 ?은 과 같은 글자라고 함)이다. ‘석명(釋名)’의 석병(釋兵)에 의하면 모(矛)의 길이가 1장8척인 것을 삭( )이라고 했다. 4m15㎝ 정도의 긴 창으로 말 위에서 사용하는 무기였다. ‘주서’에서 고구려의 무기로 언급한 창 3가지(戟, , 矛) 가운데 하나가 삭이다. 또한 ‘주서’와 ‘북사’ 백제전에서 병유궁전도삭(兵有弓箭刀 )이라 기록해 백제도 삭을 사용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전쟁 기록에서는 두 차례 삭(?)이 보인다.

 첫째, 신라 진덕왕 원년(647) 백제가 신라의 감물성을 공격하자, 김유신 장군이 지휘하는 1만 명의 보병·기병부대가 이에 맞서 싸웠는데 이들은 초전에 백제군에 패배했다. 이에 김유신 장군은 자신이 화랑 때부터 낭도로 데리고 있으면서 동고동락해 온 부하 비녕자(丕寧子)를 불러 같이 술잔을 나누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김유신: “‘날씨가 추워진 이후에야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늦게까지 푸르다는 사실을 안다’라 하였다. 오늘의 상황이 급하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용기를 내 (적진으로 들어가 용전분투하여) 뭇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겠는가?”

 비녕자: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저에게 이 일을 맡기시니, 저를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보답하겠나이다.”

 이 대화를 마친 후 비녕자는 말을 채찍질해 창(?)을 비껴 들고 적진에 돌진해 몇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전사했다. 이 사례는 신라 때 말 위에서 다루는 창인 삭을 쓰는 전투원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둘째, 신라 태종 무열왕 2년(655) 신라군이 백제의 조천성을 공격하는 전투에 김흠운(金欽運)이 낭당대감의 직책으로 참전했다. 양산 아래에 군영을 설치한 신라군을 백제군이 야간에 기습 공격해 신라군이 크게 혼란에 빠졌다. 이때 김흠운이 말에 올라 창(?)을 잡고 적진으로 가려고 했다…그는 적과 싸워 몇 명을 죽이고 전사했다. 낭당대감의 직책으로 참전한 김흠운이 위급한 상황에서 창을 잡고 말에 올라 응전한 것으로 보아 낭당대감급의 기병부대 중간층 지휘관들은 창을 기본 무기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겠다.

 다음은 극(戟)과 과(戈)다. ‘석명’ 석병과 ‘주례’ 고공기에 의하면, 손잡이 반대쪽 전방의 끝 부분에 1~2개의 날카로운 칼날 가지가 위로 올라가 붙어 있는 창이 극(戟)이며, 칼날 가지가 위로 올라가 있지 않고 옆으로 나란히 붙어 있는 창이 과(戈)다. 극과 과는 둘 다 모(矛)와 같이 길이가 6척6촌이다. 극은 ‘주서’ 고구려전에서 고구려의 주요 무기로 소개돼 있다.

 신라 진평왕 23년(602) 아막성 전투에 지휘부에 편성돼 참전한 급간 무은(武殷)이 패배한 백제군을 추격하다 군사들이 지쳐 회군하게 됐다. 이때 백제 복병이 후미에서 행군 중이던 무은을 끌어당겨 말에서 떨어뜨렸다. 이 순간 무은의 아들 귀산(貴山)은 “나는 이전에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고 스승에게 배웠다. 어찌 내가 달아나겠는가?”라 하며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자기의 말에 부상한 아버지를 태워 보낸 후, 추항과 함께 창(戈)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다. 신라 군사들이 이 모습에 감동 받아 용감하게 싸워 신라군이 승리했다.

 다음은 창(槍)이다. 이것은 자루의 양 끝단에 예리한 칼날을 붙인 무기다. 이 창이 보이는 전투 사례로는 신라 태종무열왕 2년(655)에 승려의 신분을 벗고 종군한 취도(驟徒)가 전쟁터에서 진격 명령에 따라 창과 칼(槍劒)을 가지고 돌진해 적 몇 명을 죽이고 자신도 전사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런 여러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 창은 칼과 함께 근접전투에서 중하게 쓰인 무기였다. 또한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창이 활과 칼에 비해 많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전투현장에서 강한 전투력을 발휘한 무기가 바로 창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한편 신라는 창을 운용하는 독립적인 부대를 편성해 운용했는데 이를 장창당(長槍幢)이라고 불렀다. 문무왕 12년(672) 석문전투에서 두선(豆善)이 지휘한 장창당 부대가 당군 3000여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장창당 부대의 활용도를 높이 평가한 신라는 효소왕 2년(693)에 수도 경주를 방위하는 부대인 9서당을 편성할 때, 장창당을 비금서당으로 명칭을 변경해 창 부대를 계속 유지했다. 또한 신라는 말에 탄 적을 끌어내려 죽이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개지극당(皆知戟幢)이라는 대기마용(對騎馬用) 창 부대를 신문왕 10년(690)에 편성해 운용했다.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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