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허중권교수의 고대전쟁사

외날은 ‘도’<刀> 양날은 ‘검’<劍>…근접전 전용무기

입력 2015. 05. 1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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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고대 무기체계(Ⅰ) - 칼


백병전 주 무기는 칼이었다

전투현장서 적 베어 죽이거나

전공 헤아리기 위해 목 베거나

 

 

 

 우리나라의 고대 전쟁에 사용된 무기체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기록해 놓은 우리 측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 측 기록에 우리나라 고대 무기체계에 대해 대략적으로 언급해 놓은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부여의 무기에 대해서는 ‘후한서’와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이궁시도모위병(以弓矢刀矛爲兵)이라 해 “활·화살·칼·창을 병기로 사용한다”고 했다. 고구려의 무기에 대해서는 ‘양서’와 ‘남사’ 동이열전 고구려전에서 국인상기력편궁시도모(國人尙氣力便弓矢刀矛)라 해 “고구려 사람들은 기력을 숭상해 활·화살·칼·창을 잘 사용한다”라 했고, ‘북사’와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전에서는 병기여중국략동(兵器與中國略同)이라 해 “고구려의 병기는 대략 중국의 것과 같다”라고 했다.

 한편 백제에 대해서는 ‘주서’와 ‘북사’ 이역열전 백제전에서 병유궁전도삭이라 기록해 “병기는 활·화살·칼·창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에 대해서는 ‘북사’ 이역열전 신라전에서 기문자갑병동어중국(其文字甲兵同於中國)이라 해 “문자와 갑옷 및 병기는 중국과 같다”고 했다.

 위에서 살펴본 중국 기록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 및 신라 등 삼국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무기가 활·화살·칼·창이었다는 것, 고구려와 신라의 무기 시스템이 동시대 중국의 그것과 유사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무기 시스템이 중국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중국 측 사료를 바탕으로 삼국시대의 병사가 전쟁터로 나갈 때 휴대했을 무기들을 살펴보자. ‘신당서’의 군사 분야 서술편인 병지에 의하면 병사 개인은 활 1자루, 화살 30대, 전통 1개, 칼[橫刀(횡도)라 표현됨] 1자루, 칼을 가는 데 사용하는 숫돌 1개, 송곳 1개, 모전으로 만든 모자 1개, 모전 옷 1벌, 바지를 묶는 끈 1개, 보리 9두(斗)와 쌀 2두를 휴대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무기들은 개인적으로 준비해 지참해야 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삼국의 경우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병사 개인을 볼 때 원거리용 무기는 활, 근접전(백병전)용 무기는 칼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제 칼이 전쟁 상황에서 사용된 사례들을 살펴보자.

 고구려 대무신왕 5년(22)에 부여를 공격한 초기 전투에서 고구려의 괴유(怪由)가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부여국 왕을 공격할 때, “칼(劍)을 빼어 소리를 지르며 공격하자 부여군이 무너졌고, 괴유는 곧바로 전진해 부여왕을 잡아 머리를 베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라 진평왕 24년(602)에 백제가 현재의 남원 지방에 있던 아막성을 공격했을 때,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화랑 귀산과 추항을 표현한 기록에는 “싸우다가 온몸에 칼을 맞아[瘡滿身(금창만신)이라 기록돼 있는데, 금창은 도상(刀傷)이라 해 칼에 맞아 생긴 상처를 의미함] 돌아오는 도중에 사망했다”라고 돼있다.

 신라 진덕왕 원년(647)에 백제가 신라의 감물성 등을 공격하자, 이에 대응해 출전한 김유신 장군의 부하 중 비녕자(丕寧子)가 적진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자신의 종 합절(合節)에게 “아들 거진(擧眞)이 나의 죽음을 알면 따라 죽으려 할 것이니 그를 만류하라”고 당부했다.

 비녕자의 장렬한 전사 장면을 목격한 아들 거진이 적진으로 가려 했고, 이를 합절이 만류하자 거진은 칼(劒)로 합절의 팔을 쳐서 끊고 적진으로 돌진해 전사했다. 이에 합절은 “나의 하늘이 무너졌으니, 내가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라 하고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 세 사람의 죽음을 바라본 신라 군사들이 감격해 다투어 적진으로 돌진, 적진을 함락하고 3000여 명의 목을 베어 죽였다고 했다.

 신라 태종무열왕 2년(655)에 백제가 현재 영동의 조천성을 공격하자 실제사에서 수련 중이던 도옥(道玉)이라는 승려가 “나는 종군해 나라에 보답하고자 한다”면서 승복을 벗고 군복을 입고 이름 또한 취도(驟徒: 달려가 군사가 됐다라는 뜻)로 바꾸고 삼천당이라고 하는 부대에 소속돼 전장에 갔다. 그는 그곳에서 진격 명령에 따라 창과 칼(槍劒)을 가지고 돌진해 적 몇 명을 죽이고 자신도 전사했다.

 한편 이 전투에는 국왕의 사위로서 문노(文奴) 화랑에 소속된 낭도 김흠운(金欽運)이 낭당대감의 직책을 부여받아 참전했다.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혼란에 빠진 신라 진영에서 그는 적과 대적하려 했다. 대사 전지가 “지금 어둠 속이라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데 공이 비록 죽는다고 해도 알아줄 사람이 없을 것이며, 왕의 사위인 공이 전사하면 적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고 우리 신라군의 수치가 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는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알아주고 말고를 신경 쓰겠는가?”라 하고 칼(劒)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몇을 죽이고 전사했다.

 열기(裂起)는 신라 문무왕 원년(661) 평양에 접근한 당군에게 신라가 군량을 지원하는 작전에서 활약한 사람이다. 그가 군사 구근 등 15인으로 구성된 결사대에 포함돼 “활과 칼[弓劍(궁검)]을 가지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들어가니 고구려 군사들이 바라만 볼 뿐 막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시대의 여러 전쟁 관련 사료를 보면, 전투 현장에서 적을 베어 죽이고[斬(참)으로 기록됨], 전공을 헤아리기 위해 죽은 적의 목을 베는[斬首(참수)로 기록됨] 내용이 많이 보이는데, 이러한 경우들은 대체로 위 사례에서 도(刀) 혹은 검(劍 또는 劒)으로 표현된 칼이 사용됐다 하겠다. 일반적으로 칼은 외날의 형태를 취한 것을 도(刀)라 하고, 양날의 형태를 가진 것을 검(劍)이라고 했다.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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