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야기로 풀어 쓴 북한사

판문점서 귀순한 이수근, 위장간첩 죄명으로 사형

입력 2015. 05. 1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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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탈북자


北 노금석 중위 휴전 2개월 만에 MIG-15 전투기 타고 내려와

1987년 청진의과대학 의사 김만철 일가 11명 기획탈북 후 귀순

 

 

 ■탈북자 2만7000명 시대

 통일부의 ‘2015 통일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현재 탈북 후 국내로 입국한 북한주민(이하 탈북자)은 총 2만7518명이다. 그 숫자만큼이나 이제 우리 주위에서 탈북자들을 보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탈북자는 남자 8251명, 여자 1만9267명으로 여자가 두 배 이상 많았다. 연도별로는 2000년 이전까지는 누적 입국자가 1000명도 안 됐지만, 이후 급증해 2009년 한 해에만 2914명이 입국했다. 그러나 이후 감소 추세로 지난해 입국자는 1396명이다.

 오늘은 그동안 우리의 주목을 끌었던 탈북자 중에서 육·해·공로를 이용해 입국한 세 가지 사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MIG-15 타고 귀순한 노금석

 


 

 


 북한 공군 조종사 출신 귀순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는 1983년 MIG-19를 타고 온 이웅평 대위와 1996년 이철수 대위가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훨씬 전에 전투기를 타고 귀순한 이가 있는데 그가 바로 노금석 중위다. 그는 휴전 2개월 만인 1953년 9월 21일 MIG-15를 타고 귀순했다.

 노금석은 6·25전쟁 중 북한 공군으로 참전한 인물이다. 그는 1950년 9월 해군군관학교 재학 중 조종사로 선발됐다. 이때는 북한 공군이 궤멸된 상황으로 북한은 조종사 양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노금석은 조종훈련을 받고 1951년 11월 의주로 배치된 이후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귀순 이후 여러 증언을 쏟아냈다. 개전 초기 북한 공군의 궤멸과 이후 조종사 양성 과정, 소련 조종사들의 전투능력, 공중전 경험, 휴전 직전 중국 땅에 있던 전투기의 북한 밀반입 과정, 그리고 휴전 이후 공군 전력 등 다양했다.

 노금석이 주목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타고 온 전투기 때문이기도 하다. MIG-15는 당시로서는 첨단 제트전투기였다. 6·25 전쟁 기간에 미 공군의 F-86과 제공권을 놓고 싸울 정도였다.

 이런 까닭에 미 공군은 전쟁 말기인 1953년 4월 공산군 측 조종사들을 대상으로 ‘물라(Moolah)’라는 작전을 펴기도 했다. ‘물라’는 미국 속어로 돈을 의미한다. 이 작전은 MIG-15로 귀순하는 조종사에게는 5만 달러의 현상금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처음 귀순하는 자에게는 5만 달러의 상금을 추가로 지급하고, 정치적 도피처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노금석은 이 계획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혜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귀순 당시 노금석은 이 계획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귀순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닌 뒤 항공회사에 근무했고, 이후 대학교수로도 활동했다. 그가 타고 온 MIG-15는 현재 미 공군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판문점에서 ‘기습’ 귀순한 이수근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기습적’인 귀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주인공은 당시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이었다. 이날 판문점에서는 제242차 군정위 본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 속에 이수근도 있었다.

 판문점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이문항 전 유엔사 특별고문은 이수근의 귀순에 직접 관련된 인물이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회담장 밖에서 그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자신에게 다가왔고, ‘남쪽으로 가고 싶은데 도와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문항은 이를 유엔사 측 수석대표에게 전했고, 이수근을 남쪽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방법은 이랬다. 유엔사 측이 세단 한 대를 대기해 놓으면 이수근이 재빨리 차에 탑승해 남쪽으로 달린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이수근에게도 전달됐다.

 오후 5시20분쯤 본회의가 끝나고, ‘작전 개시’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나 이수근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차량 대신 영국군 장군 차에 잘못 올라탔다. 계획을 몰랐던 운전병은 출발하지 않았고, 이를 지켜본 다른 북한기자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유엔사 전방지원부대장 톰슨 중령이 재빨리 차에 탄 뒤 운전병에게 남쪽으로 달리라고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도 있었지만, 이수근은 무사히 남한에 오게 됐다.

 당시 정부는 이수근의 귀순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1967년 4월 10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서울시민 환영행사를 열어줬고, 큰 금액의 정착금도 지급했다. 국내 한 대학의 여교수와 결혼도 주선해 줬다. 그러나 이수근은 귀순 당시 ‘개인문제 때문에 부득이 왔다’고만 할 뿐 구체적인 귀순 동기가 부족해 보였다. 또한 북한 언론의 반미선전을 되풀이하는 언행을 하곤 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여러 면에서 의심을 받았다. 그러던 중 이수근은 1969년 1월 27일 위조여권을 만들어 베트남을 경유해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가려다 사이공에서 체포됐다. 이후 국내로 압송된 뒤 1969년 7월 3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위장간첩’이 그의 죄명이었다. 일부에서는 그가 노동당 대남사업총책 이효순의 월남귀순 지령을 받고 위장 귀순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수근에 대한 재심을 권고했고, 2008년 법원은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그가 사형당한 지 39년 만이었다.



 ■‘따뜻한 남쪽나라’ 찾아온 김만철 일가

 

 

 



 1987년 1월 15일 새벽 청진에서 50톤급 선박이 북한을 출항했다. 이 배에는 당시 청진의과대학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김만철 일가(장모·처남·처제 포함) 11명이 타고 있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일종의 ‘기획탈북’이 실행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배는 엔진 고장으로 표류하다 1월 20일 일본에 도착했다. 입국 경위를 묻는 일본 측에 이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남쪽 나라’가 어딘지는 불분명했다. 남한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제3국일 수도 있었다. 당시 김만철 일가의 입장도 명확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은 이들의 통역을 조총련계 인물에게 맡겼고, 이는 곧 북한에 보고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그 결과 남과 북이 이들을 데려오기 위한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게 됐다. 당시 우리 정부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주일 한국대사관은 이들에게 한국 실상을 보여주며 남한행을 설득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일본 총리에게 친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사건 발생 직전 어선 후지산마루호의 선장이 불법어로 혐의로 북한에 억류된 상황이었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우리 정부를 위해 일본 측이 제시한 방안은 공해상에서의 인수·인계였다. 이는 일본이 김만철 일가를 불법입국자로 간주해 공해상으로 추방하면, 한국이 이들을 인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북한에게도 알려지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일본은 김만철 일가를 제3국, 즉 대만으로 추방하기로 했다. 그리고 2월 7일 새벽, 자위대 항공기(YS-11)를 이용해 비밀리에 이들을 대만으로 보냈다. 당시 대만은 한국과 수교 중이었고 북한과는 미수교 상태였다. 정부는 대만정부와 교섭을 위해 대표단을 보냈고, 여기에는 김신조와 이웅평도 참여했다. 그 결과 김만철 일가는 대만 도착 하루 만인 2월 8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하게 됐다. 11명 일가족이 집단으로 탈북 후 귀순한 것은 이들이 처음이었다.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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