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허중권교수의 고대전쟁사

신라, 당과 내통한 한성 주둔 사령관 참수형

입력 2015. 05. 0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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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포상과 처벌(Ⅵ·끝)


백제와 싸우다 패배한 장수, 패전 책임 물어 신분 강등

군율로 전투 시 하지 말아야 할 행동 정해 위반자 처벌

 

삼국의 군율 위반자 처벌 사례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포상 사례에 비해 매우 드물게 기록돼 있다. 이 사례들을 형벌을 가한 경우와 신분을 강등시켜 처벌한 경우로 구분해 살펴보자.

 


 


 



  당, 한반도 장악 의도 노골화


 먼저 군율 위반으로 처형한 사례는 두 차례가 기록돼 있는데, 668년의 경우부터 보자. 이 사례는 671년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한 당나라 총사령관 설인귀와 신라 문무왕 사이에 주고받았던 서신에 포함돼 있다. 당의 설인귀는 먼저 신라 문무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신라가 당에 저항할 마음을 품지 말고, 선왕 무열왕의 뜻을 따라 머리를 굽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문무왕은 답서에서 대백제 전쟁 및 대고구려 전쟁에서 신라가 당에 지원한 군수물자 등을 예시하면서 신라는 최선을 다했음을 강조하고, ‘당이 대고구려 전쟁 이후 신라에 대해 행한 무례하고 몰상식한 행동들’을 열거했는데 그중에 처벌 사례가 들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68년 당은 다른 마음을 품고, 백제 출신 여인을 꾀어 한성 주둔 신라 사령관 박도유(朴都儒)에게 보내 미인계를 사용했다. 이 여인이 박도유를 회유, 설득해 몰래 한성에서 보유하고 있던 병기를 훔쳐 당에 합류해 신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도중에 발각돼 한성도독 박도유는 처형됐다.” 앞 편에서 살핀 군율에 의하면 박도유의 경우는 적과 내통한 죄, 아군의 무기를 적에게 넘기려 한 죄, 적의 침략 의도를 알고 보고하지 아니한 죄 등에 해당돼 참수된 것이다.

 두 번째 처형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이뤄졌다. 670년 한성 주둔 신라 사령관 수세(藪世)가 멸망한 백제의 여러 지역을 장악해 당에 넘겨주고 자신도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도 그 의도가 발각돼 신라 왕실에서 진주(眞珠)를 보내 그를 처형했다. 이 두 사례는 668년 고구려 정복 이후 당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그에 따라 당군과 접촉하는 지역의 군사 책임자들이 흔들렸던 모습을 보이는 자료라 하겠다.

 

 

  당군 접촉지역 신라군 책임자 회유


 나당전쟁의 와중인 670년에 문무왕은 당과 구백제 세력이 신라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병력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도록 했다. 품일·문충·중신·의관·천관 등이 63개의 성을 쳐서 빼앗고 주민들을 내지로 옮겼으며, 천존과 죽지 등은 7개 성을 빼앗고 2000명을 목 베었다. 또한 군관과 문영 등은 12개 성을 빼앗고 오랑캐 군사를 쳐서 7000명을 목 베고 많은 말과 병기를 탈취했다.

 다음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신분을 강등시킨 사례들을 살펴보자. 첫째, 190년 와산(蛙山)전투에서 침공한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패배한 좌군주(左軍主) 구도(仇道)를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시켰다. 좌군주는 병권을 맡는 직책으로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 격이다. 구도는 전투에서 패배해 좌군주에서 부곡이라는 지방의 성주로 좌천된 것이다. 벌휴왕 2년(185년)에 4등급 관등 파진찬으로서 좌군주에 임명된 구도는 188년 모산성 전투와 189년 구양 전투에서 백제군과 싸워 승리했으므로 그 관등이 상승했을 것이다. 따라서 부곡성주로 좌천된 것은 대단히 심한 처벌을 받은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둘째, 222년 우두주(牛頭州)에 침범한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패배한 이벌찬 충훤(忠萱)이 진주(鎭主)로 좌천됐다. 충훤도 이벌찬의 제1관등으로 내외의 병마를 맡고 있다가 전투에 실패한 벌로 변경의 군사주둔지 책임자로 좌천됐으므로 구도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

 셋째, 661년 백제부흥군과 싸워서 패배한 신라 장수들에게 무열왕이 벌을 내린 경우다. 태종무열왕 8년(661) 3월 5일에 백제군이 두량윤성 남쪽의 신라 진영 만드는 곳을 기습 공격했고 신라군은 패배해 도망했다. 3월 12일 신라군이 고사비성에서 나와 두량윤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4월 19일에 회군했다. 철수하다가 빈골양에서 백제군을 만나 싸웠지만 패배했다. 전사자는 적었으나 병기·짐수레는 많이 잃었다. 그에 따라 여러 장수들의 죄를 논의하고 그 행위에 따라 각각 차별을 두어 처벌했다는 기록이다. 어떤 차별을 두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지만 논공(功)의 주요 내용이 관등의 상승인 것을 고려할 때, 논벌(論罰)의 주요 내용 또한 관등의 하락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넷째, 668년 고구려 정복 전쟁 직후 원정군에 대한 포상조치 때 전공은 있으나 군령을 어겨 포상을 받지 못한 사찬 구율(求律)의 경우다. 구율은 신라군의 평양성 공격 시 사천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진격해 크게 이겼지만 군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상을 받지 못했다. 이 경우를 통해 신라는 전투 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군율로 정해 시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투서 지면 가족·사회로부터 멸시 받아


 마지막으로 원술(元述)의 경우를 살펴 보자. 그가 비장으로 참전해 패배하자 부친 김유신은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 아니라 가훈을 저버렸으므로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고, 원술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겨 부친을 보지 못하고 시골농장에 숨어 지냈으며, 부친 사망 후에도 모친은 원술을 보지 않으려 했다. 이후 매초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관직이 내려졌지만 그는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신라 사회에는 전투 시 잘못된 행동에 대해 사회적인 통념으로서 멸시와 같은 인식이 존재했다고 하겠다.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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