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야기로 풀어 쓴 북한사

베트남 통일, 김일성 무력통일 야욕 부채질

입력 2015. 04. 26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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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남베트남 패망과 북한 ①


1958년 김일성 북베트남 방문으로 양국 관계·교류 강화

베트남이 캄보디아·중국과 전쟁 때 북한 등 돌리자 ‘냉각’

베트남 통일 후 경각심 느낀 북한, 한반도 위기조장 획책

 

 

 


 


 오는 4월 30일은 베트남 통일 40주년이 되는 날이다. 동시에 이날은 남베트남(월남) 패망일이기도 하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은 무너졌다. 북베트남의 무력침공이 시작된 지 불과 5개월 만이자 미국·한국 등 자유 7개국이 파리평화협정에 따라 군대를 철군한 지 2년 만이었다. 남베트남 패망 40주년을 맞아 패망 당시 우익 인사들에 대한 공산정권의 탄압, 북한과 베트남 관계, 베트남 통일에 대한 북한의 반응, 그리고 당시 억류된 우리 외교관에 대해 북한이 벌였던 납북공작 등을 중심으로 2회로 나누어 살펴보자.



 ■남베트남 패망과 우익 인사 탄압

 통일 직후 북베트남 공산정권은 남베트남을 공산주의 체제로 개조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른바 ‘남부(南部)의 북화(北化)’였다. 이 중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남베트남의 주요 인사들, 즉 이른바 우익 인사들에 대한 사상 재교육이었다.

 그 과정은 이랬다. 사이공을 함락한 공산정권은 1975년 5월 초 구(舊)정권의 모든 군인과 공무원들에게 등록을 명령했다. 그 결과 100만 명 이상이 등록했고, 이후 대상자가 국영기업직원·교사·의사 등으로 확대되면서 숫자는 더 늘어났다. 이들 중 장교가 아닌 일반사병, 하위직 공무원, 당장 사회가 필요로 하는 교사·의사들은 대부분 사흘의 교육을 받고 일상에 복귀했다. 1976년 6월까지 재교육 대상자로 등록한 사람의 95%가 교육을 받고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나머지 5%, 즉 5만 명 이상의 군 장교와 고위 공무원 등은 반통일·반공산주의 핵심세력으로 분류돼 3~5년의 교육을 받았다. 일부는 그 이상의 교육에 처해졌다. 당초 이들에게는 10일간의 사상개조 학습만 받으면 별다른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한 조사에 따르면 통일 7년이 지난 1982년에도 최소 12만 명이 재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산정권도 이를 일부 인정해 1985년 약 1만 명을 재교육 중이라고 밝혔다.

 이들에 대한 교육 내용은 주로 사회주의 이념, 베트남 공산당 역사, 통일의 정당성, 남베트남의 오류, 미국의 죄악 등이었다. 수용자들에게는 끊임없이 자아비판이 강요됐고, 각종 노역과 학대가 자행됐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인원이 죽기도 했다.

 다행히 살아남은 자들은 ‘교육완료 증명서’와 함께 풀려났지만 감시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공산정권의 탄압을 피해 100만 명이 넘는 대규모 난민(boat people)도 발생했다. 통일 이후 나타난 베트남 상황은 일방적으로 ‘먹힌 자’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북한과 북베트남 관계

 북한은 베트남전쟁에 공군과 심리전부대 등을 참전시키는 등 북베트남과 친밀한 사이였다. 북한의 베트남전쟁 참전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 연재(2014년 9월 30일 자)에서 다룬 바 있다.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는 1950년 양측이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시작됐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고, 북한은 6·25 전쟁 중이라 양측 간에는 ‘제국주의와의 대결’이라는 ‘동질감’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후 베트남이 미국과 전쟁하면서 동질감은 더욱 강해졌다.

 그 결과 6·25 전쟁 기간 중에 베트남 측 인사들이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그 예로 1951년 5월에는 국제민주여성대표단 일원으로 레티귀라는 북베트남 대표가 평양·신의주·남포 등을 방문했고, 1951년 9월에는 북베트남 민족통일전선 전국위원회의 부주석이 방문했다. 특히 이들은 동부전선의 월비산 고지를 방문했다가 당시 미 공군의 폭격으로 죽을 뻔하는 위기를 겪기도 한다.

 북한도 베트남에 대표단을 보냈다. 1956년 10월 28일 북한 문화대표단이 베트남을 방문해 약 40일간 머무르며 공연을 선보이고 교류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북한대표단은 현재 관광지로 유명한 하롱베이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런 교류의 결과 1957년 7월에는 호찌민이 북한을, 1958년 11월에는 김일성이 북베트남을 방문하며 관계는 더욱 강화된다.

 1960년대에도 교류는 활발히 지속됐다. 1961년 6월에는 팜반동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공동코뮈니케를 발표했다. 1963년 6월에는 박금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대표단이 하노이를 방문했는데, 당시 베트남은 군중대회를 열며 이들을 환대했다. 북한은 북베트남 정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베트콩’으로 알려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과도 관계를 맺었다. NLF는 1966년 6월 북한에 상주대표단을 파견하면서 북한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런 양측의 교류의 ‘결실’이 북한의 베트남 참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양측 관계는 베트남이 1978년 캄보디아, 1979년 중국과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베트남을 비판하고, 캄보디아와 중국 편을 들면서 냉각기에 접어든다. 2000년대 이후 관계 개선을 해 나가는 중이지만, 북한의 가슴 한쪽에는 베트남에 대한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 통일과 북한의 반응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이 무력통일을 이루자 김일성은 축전을 보내고, 베트남대사관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축하 연회를 개최하며 ‘통일’을 축하해줬다. 당시 북한 매체는 베트남 통일을 ‘투쟁의 빛나는 결실, 월남 인민의 위대한 승리’라는 내용의 글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베트남 통일을 지켜보면서 김일성은 이제 한반도 차례라는 생각과 함께 베트남보다 무력통일이 늦어졌고, 그 결과 ‘경쟁자’ 호찌민에 비해 자신이 낮게 평가된다는 생각에 기뻐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일종의 ‘경각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베트남 통일로 촉발된 북한의 ‘경각심’은 김일성의 중국 방문으로 나타났다. 김일성은 베트남의 무력통일이 거의 가시화되는 1975년 4월 18일 중국을 방문한다. 중국에서 김일성은 모택동·주은래·등소평 등을 만나고, 북·중 친선과 함께 아시아에서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데 함께하자고 촉구한다. 또 ‘전쟁이 일어난다면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을 것은 통일’이라며 무력통일에 대해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의 중국 방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베트남 통일은 북한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으로 베트남에 파병된 외국군대가 철수하자 북한도 미국에 대해 이전까지 남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입장에서 돌변해 미국과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나선다. 더불어 외국군대 철수 주장을 더욱 강조한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베트남에서 보고 배운 측면이 강했다.

 더불어 위기 조성에도 나선다. 김일성은 노동당 창건 30주년인 1975년 10월 10일까지 남침용 땅굴 작업을 완료할 것을 지시하는데, 이것도 베트남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6년 8월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도 그 연장선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의 생각은 베트남 상황과 한반도 상황을 동일시한 오판에 불과했다. 대한민국이 남베트남과 다르다는 것을 김일성은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다음 회 계속)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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