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알려지지않은 6·25 전쟁영웅

계속된 후퇴 울분 씻듯육탄으로 적 남진 저지

입력 2015. 04. 1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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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경윤호(景允鎬) 대위와 강릉·안동전투




 

 

 


 

 

   ● 이범석 국방부 장관, 간부 확충으로 전쟁을 대비하다.

 경윤호 대위는 전북 부안군 벽산면에서 1930년 6월 4일 출생했다. 그는 1948년 12월 7일 육사 제8기로 사관학교에 입교해 1949년 5월 23일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었던 이범석은 북한군의 남침 위협에 대비, 적극적으로 군 간부 확충에 주력했다. 특히 육사 8기생은 최초로 군 경력자가 아닌 순수 민간자원에서 선발해 1345명이 장교로 임관했다. 이들은 전쟁 기간 내내 소·중대장 그리고 일부는 대대장으로 최전선에서 젊은 피를 뿌리며 대한민국을 구했다. 전쟁 중 전사자는 419명, 졸업생의 약 3분의 1에 달한다. 경윤호 중위(당시 계급)는 전쟁 발발 당시 제8사단 제21연대 제3대대 제9중대에서 중대장 대리로 근무하고 있었다.



   ● 북침 궤변 반박하는 전쟁발발 전의 북한군 동해안 상륙

  6·25전쟁 발발 당시 제8사단(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2개 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예하 제10연대는 38선 경계를, 제21연대는 후방의 적 유격대를 토벌 중이었다. 1950년 6월 25일 04:00 북한군 제5사단과 38경비1여단은 북쪽에서 공격을 시작했고, 제766유격대와 제549육전대는 강릉 남쪽에 상륙해 동시에 아군을 공격했다. 적 병력은 약 2만8000여 명, 화포도 100여 문을 가진 막강한 전력이었다. 이에 비해 아군 제8사단은 병력 7000여 명과 105M 곡사포 15문만 보유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06:00, 제21연대장 김용배 중령은 삼척경찰서로부터 적이 동해안으로 상륙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1949년 대대 병력을 인솔해 월북했던 표무원이 이끄는 북한유격대였다. 앞서 03:00 정동진 해안초소의 전대욱 순경은 발동선 30척, 범선 40척, 어뢰정 4척의 대규모 적 상륙부대를 확인하다 북한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6·25전쟁 최초의 전사자다.

 북한은 전쟁 당일 한국군이 먼저 북침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반격으로 38선을 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궤변에 불과하다. 북한은 전쟁 발발과 동시에 대규모 특수부대를 동해안에 상륙시켰다. 당시 선박의 항해속도를 고려할 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쟁 1~2일 전에 38선 이북 항구에서 미리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정동진 7번 국도 옆에는 당시 북한군 상륙 상황을 증언하는 ‘6·25남침 사적탑’이 남아 그날의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 사기충천한 장병 시내 진입에 강릉시민 환호하다

 이렇게 상황이 매우 급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경윤호 중위의 제9중대는 장성광산을 경계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긴급하게 내려온 제21연대의 강릉 이동 명령에 따라 제3대대는 주변 광산의 민간차량을 최대한 확보해 전 병력을 탑승시켰다. 갑작스러운 전쟁 상황에 장병들은 긴장했지만, 이번 기회에 북진으로 조국을 통일시켜야 한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그리고 삽달령(강릉~태백 간 35번 국도)의 험준한 산간도로를 이용해 6월 27일 09:00 강릉에 도착했다.

 귀청을 찢는 포성에 강릉 시민들은 어쩔 줄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이때 제3대대 장병들이 우렁차게 군가를 부르며 시내에 들어오자 시민들은 사지에서 살아난 듯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그러나 이미 제8사단의 주저항선은 무너지고 일선 병력들이 분산 후퇴하고 있었다. 사단장은 즉각 제21연대 제3대대로 하여금 강릉에 근접한 적을 격멸하도록 공격명령을 내렸다.

 경윤호 중위와 중대원들은 장장 70㎞의 산길을 강행군한 피로를 풀 겨를도 없이 곧장 사천선으로 진출했다. 제3대대는 제9중대를 우일선, 제11중대를 좌일선에 배치하고 제10중대와 제12중대가 공격제대 엄호를 맡도록 했다. 공격을 개시한 제9중대는 09:30 사천강을 건넜고 11:00에는 부근의 156고지 7부 능선까지 진출했다. 경윤호 중위의 과감한 지휘 하에 중대원들은 수류탄전을 감행하며 목표 정상을 탈취했다.



  ● 목표 점령, 그러나 압도적인 적 병력에 다시 후퇴

 산 정상을 점령한 제9중대가 전열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대대 규모의 적들이 몰려왔다. 고지 정상의 제9중대와 제11중대는 사력을 다해 40분간을 버텼다. 적의 강력한 포격은 계속됐고 아군 사상자가 속출했다. 결국 제3대대는 눈물을 머금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인접 제11중대장 맹보영 중위는 옆에서 연락병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그냥 물러나야만 했다. 마침내 제8사단은 6월 27일 14:00,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대관령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경윤호 중위를 비롯한 중대원들은 제천·단양으로 철수하면서 적과 수차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또한 제8사단은 7월 24일을 기해 중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제1군단에 수도사단과 함께 배속됐다. 이어 제8사단은 안동 내성천 연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북한군 제12사단과 격돌하게 된다. 



   ● 안타까운 전사, 안동 내성천 전투

 1950년 7월 24일 새벽, 경윤호 중위의 3대대 정면으로 증강된 적 연대병력이 은밀히 접근했다. 이미 아군 후방에는 적 침투부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공격 개시와 동시에 한 무리의 적병들이 아군 진지를 덮쳤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제9중대원들은 적과 뒤엉켜 백병전에 돌입했다. 적은 아군 조명탄 아래 훤히 노출된 상태에서도 꾸역꾸역 내성천을 건너왔다. 이에 맞서는 아군 장병들의 투혼도 만만치 않았다. 계속되는 후퇴의 울분을 씻으려는 듯 육박전을 펼쳤다.

 그 순간 병사들의 선두에서 백병전을 하던 경윤호 중위에게 수발의 따발총이 난사됐다. 카빈총 개머리판으로 적병을 내리치던 그는 쓰러졌다. 바로 옆의 통신병이 소대장을 안고 교통호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뜨거운 피가 두 사람의 군복을 적셨다. 6·25전쟁 초기부터 중대장 대리 근무를 훌륭히 수행하며 모든 전투에 앞장섰던 경윤호 중위. 약 1달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그는 1950년 7월 24일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경윤호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대위 계급을 추서하고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7-1-061) 있다. 국방부는 한국전쟁사(제1권 226쪽)와 단양-의성전투사(135쪽)에 그의 활약에 대해 수록하고 있다.

전쟁과 평화연구소 신종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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