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알려지지않은 6·25 전쟁영웅

“대대장의 원수를 갚자” 피끓는 격전 일진일퇴

입력 2015. 04. 12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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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최취성(崔就成) 소령과 강릉·단양전투


북한군 진격 저지했으나 중과부적 … 흩어진 대대 수습해 단양으로 철수

죽령 936고지 점령했으나 적 급습에 최취성 대위는 호국의 별로 산화

 

 

 


 


 

   국군의 한강방어선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9일째인 7월 3일 아침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북한군의 전차가 복구된 경부복선철교를 이용해 노량진에 도달하면서부터다. 북한군은 국군의 거점이었던 영등포-시흥을 짓밟고 안양과 수원을 거쳐 오산-평택 방향으로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했다. 앞선 7월 1일 미군 선발대로 대대 규모의 스미스 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그들은 7월 5일 오산시 내삼미동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격돌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T-34 전차를 격파하지 못해 무너지고 말았다.

 

 

● 최취성의 입대와 6·25 전쟁 발발

 서울에서 출생한 최취성 소령은 1947년 5월 16일 조선경비대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장교후보생 제4기로 입교해 그해 9월 10일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전·후방 각급 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중위를 거쳐 대위로 진급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이 발발했을 때 최 대위는 강릉 남쪽 50㎞의 삼척에서 제21연대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강릉에 있던 제8사단은 제10연대와 제21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그중 제10연대는 38도선 방어를 담당하고, 제21연대는 동해시 및 삼척시 일대의 해안경계와 후방지역 작전을 담당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국군 제8사단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전·후방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했다. 북쪽에서는 제1경비여단이 하조대해수욕장 부근의 38도선을 넘어 남하했다. 제5사단 제10연대가 제1경비여단의 뒤를 받쳤다. 동해안에서는 제945육전대가 강릉과 삼척 사이에 있는 정동진에 상륙하면서 제10연대와 제21연대가 분리됐다. 또한 제766유격연대는 임원진에 상륙해 제8사단의 후방을 차단했다.

 제8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제21연대에 긴급명령을 내려 강릉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최취성 대위와 제21연대는 삼척 일대의 탄광에서 차량을 징발해 6월 25일 밤 제945육전대의 차단선을 뚫고 강릉으로 이동했다.



● 최취성 대위의 강릉(군선강)전투

 최 대위는 연대장 김용배 중령의 명령에 따라 혼성부대를 지휘해 강릉 남쪽 10㎞ 지점의 군선강을 따라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6월 26일 아침 북한군 육전대는 2개 중대 규모로 군선강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최 대위가 지휘하는 혼성부대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최 대위는 포병 화력지원을 요청했다. 제18포병대대 제3포대가 7번 도로변에 포진하고 적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치열한 교전이 한동안 계속됐다. 최 대위의 혼성부대와 포병의 활약에 기세가 꺾인 북한군 육전대는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최 대위와 혼성부대의 분전으로 제8사단은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38도선에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8사단의 저항은 중과부적이었다. 전·후방이 모두 차단된 제8사단의 퇴로는 오직 하나 대관령을 넘어 내륙으로 철수하는 길뿐이었다. 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일단 대관령으로 철수해 반격의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최 대위와 제21연대는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단계적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그때 제2대대장의 전장 이탈 사건이 발생했다. 연대장은 최 대위를 임시 대대장에 임명했다. 최 대위는 진두지휘하며 흩어진 대대를 수습해 대관령으로 철수했다. 그때부터 제8사단은 원주-충주를 거쳐 단양으로 철수했다. 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지연전을 계속하면서 철수하던 중 최취성 대위를 제21연대 제1대대장에 정식으로 임명했다.



● 단양전투와 전사

 북한군 제8사단의 추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국군 제8사단은 단양을 가로지르는 남한강을 이용해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최 대위가 지휘하는 제1대대는 단양역 부근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다가 연대의 명령에 의해 7월 10일 5번 국도(현재의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단양 남쪽 15㎞ 지점 죽령으로 철수했다.

 최 대위와 제21연대 제1대대는 7월 13일 새벽 날이 밝을 무렵 죽령의 936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안개가 짙게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대대장은 제3중대를 좌측에, 제1중대를 중앙에, 제2중대를 우측에 배치해 936고지를 방어하도록 했다. 각 중대가 책임지역에 진입해 진지 편성을 마칠 무렵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때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이미 50m 전방까지 접근하면서 대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대대장 최취성 대위는 즉시 전방으로 달려나가면서 “적이다. 각 중대 사격 개시!”라고 명령했다. 적도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면서 치열한 근접전투가 시작됐다.

 급습을 받은 병사들은 바위와 나무 등 지형지물을 이용하며 응사했다. 적은 기관총을 난사하며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때 날아든 탄환이 권총을 뽑아 들고 진두지휘하던 대대장 최취성 대위의 가슴을 관통했다. 쓰러졌던 최 대위가 벌떡 일어나 권총을 잡은 왼손(오른 손목은 전쟁 전 부상으로 절단)을 높이 들고 “각 중대는……” 하며 명령을 하달하려 할 때 1발의 총탄이 머리를 관통했다.

 옆에서 중대를 지휘하고 있던 제1중대장 양보 중위가 대대장에게 달려가 안아 일으키니 뜨거운 피가 그의 팔목을 따라 흘러내렸다. 즉각 휴대하고 있던 압박붕대로 머리를 싸매고 위생병을 불러 후송을 지시했다. 위생병이 대대장을 등에 업었을 때 또 한발의 총탄이 대대장의 등을 관통하면서 위생병과 함께 호국의 별로 산화하고 말았다.

 대대장의 장렬한 전사 소식을 접한 장병은 “대대장의 원수를 갚자!”라며 분연히 일어섰으나 적의 공세는 드셌다. 중앙의 제1중대가 돌파되면서 대대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험준한 지형과 안개에 휩싸인 병사들은 방향도 분간하지 못한 채 계곡을 배회하다가 일부는 인접 부대에 합류하기도 하고, 일부는 풍기로 철수해 본대와 합류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최취성 대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소령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7-1-061) 있다. 국방부는 한국전쟁사(제1권 229·235쪽, 제2권 167·197쪽)와 전투사 단양-의성전투(49·63쪽)에 그의 활약과 전사 상황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전쟁 와중에 무공훈장조차 수여하지 못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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