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알려지지않은 6·25 전쟁영웅

장검 뽑아 들고 선두에 서서 “돌격 앞으로”

입력 2015. 03. 22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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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김일록 대위와 김포공항탈환전투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산화

김포공항탈환 실패로 끝났지만

적군 발 묶어 한강방어선 구축 기여

 

 


 

 


 

 

 

   1950년 6·25 전쟁 당시 서울과 그 근교에 2개의 공항이 있었다. 여의도공항과 김포공항이다. 기습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두 곳의 공항을 핵심 표적으로 삼아 공격을 감행했다. 6월 25일 오전 10시쯤 북한의 전투기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여의도와 김포공항을 정찰했다. 12시쯤에는 YAK기 4대가 용산 상공을 선회하며 공격을 감행했으며, 오후 4시쯤에는 YAK기 5대가 김포와 여의도공항을 공습했다. 김포공항에 계류돼 있던 미 공군 C-54 수송기 1대와 국군의 T-6 연습기 1대가 피해를 봤다.



   북 대전차포에 국군 장갑차 피격

 북한 전투기가 서울 일대의 공중을 휘젓고 다녔지만, 당시 국군은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연습기인 T-6 항공기 10대만을 보유하고 있던 국군은 북한군의 전투기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육군본부는 용산구 한남동에 주둔하고 있던 기갑연대를 주요 시설 경계에 투입했다. 김일록(金一錄) 중위가 지휘하는 도보수색대대 제8중대가 남산송신소에 배치돼 대공방어에 임했다.

 김일록 중위는 함경북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조국이 광복과 함께 분단되자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1948년 12월 7일 육군사관학교 장교후보생 제8기로 입교한 그는 1949년 5월 23일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육군 직할 기갑연대에 부임해 소대장을 맡으며 중위로 진급했다. 얼마 후 그는 도보수색대대 제8중대장에 보직됐다.

 김일록 중위가 지휘하는 도보수색중대의 대공방어능력은 지극히 미약한 것이었지만 곧이어 미 공군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북한 공군기들의 위협은 사라졌다. 대신 지상 공격부대의 위협이 시시각각 심각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서울의 북쪽에서 북한군이 동두천과 포천을 점령하고 의정부를 위협하고 있었다. 서북쪽에서는 옹진과 개성을 점령하고 한강과 임진강 도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의정부와 문산 그리고 김포반도를 방어하는 것이 선결과제로 부각됐다. 문제는 방어병력이 단 한 명도 배치되지 않은 김포반도였다.

 육군본부는 황급히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이하 김포사)를 창설하고 가용한 부대들을 끌어모아 김포반도에 투입했다. 김일록 중위의 대대장 강문헌 대위가 기갑연대의 잔여 병력을 통합 지휘해 김포반도로 향했다. 김일록 중위는 이미 가평 축선에 투입됐기 때문에 대대장과 행동을 같이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북한군 제6사단은 도하장비를 준비하지 못해 도하가 지연되고 있었다.

 최초 가평으로 투입됐던 김일록 중위가 급거 김포반도로 이동했다. 북한군은 6월 28일 오후 김포읍(현 김포시)을 점령한 데 이어 김포비행장을 점령했다. 김포비행장은 국군의 한강방어선과 지척에 있었다. 만약 그들이 영등포 방향으로 진격한다면 한강 남쪽의 방어는 불가능했다. 대대와 합류해 김포공항을 탈환하고 북한군의 영등포 진격을 저지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김일록 중위에게 주어졌다.

 김일록 중위의 제8중대가 도착하면서 기갑연대 혼성대대가 김포공항 탈환에 투입됐다. 6월 29일 오전이었다. 강문헌 대위는 장갑차를 활용해 적의 화력을 제압한 다음 김일록 중위가 지휘하는 제8중대가 돌격을 감행하도록 했다. 비행장 주변에는 공격부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은폐·엄폐물이 전혀 없었다. 비행기 이·착륙 시 안전을 위해 당연한 조치였다.

 강문헌 대위와 장갑중대는 장갑차에 의지해 공격을 감행했다. 김일록 중위가 공격을 시작하자 대대장 강문헌 대위가 진두지휘했다. 먼저 강문헌 대위와 뒤따르던 참모들이 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장갑차가 대대장을 구출하기 위해 돌진했다. 그러나 기갑연대의 M8 장갑차는 T-34 전차와 대전차포를 가진 북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장갑차가 북한군의 대전차포에 피격되면서 장갑차 소대장 김정운 소위와 승무원 모두가 산화했다.



   공격 난관에 부닥치자 과감히 돌격

 적의 포화에도 장갑차 제1소대가 적의 공격부대를 제압하고 제1차 방어선을 넘었다. 대대장이 전사하자 혼성 편성된 기갑연대 병력은 혼란에 빠졌다. 김일록 중위가 대대장을 대신해 대대를 수습했다. 김일록 중위의 통합지휘하에 제8중대와 제9중대가 활주로에 돌입했다.

 그곳에서 활주로 건너편 건물 속에 엄폐한 적과 화력을 교환하게 됐다. 김일록 중위의 공격부대는 노출된 상태에서 전진하지 못한 채 손실만 증가하고 있었다. 공격대원들은 활주로 주위에 있던 빈 드럼통을 차폐물로 삼아 앞에서 굴리며 활주로를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공격은 진척되지 못했다.

 김일록 중위의 악착같은 지휘와 독려에도 공격은 난관에 부닥쳤다. 어려운 상황이 거듭되자 대대장 대리인 김일록 중위는 솔선수범해 과감히 돌격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지녔던 장검을 뽑아들고 선두에 서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대원들의 돌격을 선도했다. 그때 적탄이 그의 다리를 꿰뚫어 그를 넘어뜨렸다.

 위생병이 달려나갔지만 치료를 거절한 김일록 중위는 다시 몸을 일으켜 부상당한 다리를 이끌며 적진으로 돌입했다. 그는 장검으로 적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겼다. 그사이에 적의 사격이 김일록 중위에게 집중됐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총탄이 그의 가슴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결국 김일록 중위는 김포공항의 활주로에 붉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김일록 중위의 전사와 함께 국군의 김포공항탈환전투는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김일록 중위의 활약은 한동안 적을 김포공항에 묶어두어 아군의 한강방어선 구축에 기여했다.



   전사한지 64년만에 충무무공훈장 수여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김일록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대위 계급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7-2-139) 있다. 국방부는 한국전쟁사 제1권(669·685쪽)과 전투사 38도선 초기전투 서부전선편(280~282쪽)에 그의 활약을 수록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2014년 6·25전쟁 공훈발굴사업의 일환으로 김일록 대위의 활약과 전사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무공훈장의 추가 수여를 상신했다. 육군본부와 국방부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국무회의에서 보훈처의 건의가 의결됨으로써 정부는 지난해 7월 김일록 대위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추가로 수여할 수 있었다. 김일록 대위가 전사한 지 64년 만에 수여된 훈장이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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