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챔프, 클라우제비츠에게 길을 묻다

스피드와 美의 조화가 중요한 아이스댄싱처럼…전쟁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

입력 2014. 11. 26   15:56
0 댓글

<49> 아이스댄싱·피겨스케이팅과 외교전


전쟁을 낳은 것은 정치요,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다

말로 하는 전쟁이 외교…총보다 혀가 더 강할 수도

 


 수은주가 조금씩 내려간다. 아이스댄싱은 얼음 위에서 음악과 율동을 가미해 즐거움을 더한다. 하얀 눈꽃처럼 전쟁론의 꽃은 제8편 6장,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다. 



● 전쟁과 정치 관계는 

 제8편 전쟁계획의 백미(白眉)는 6장이다. 백미는 중국 촉한(蜀漢·BC 221∼263) 때 마량(馬良)의 다섯 형제 모두 재주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량이 가장 뛰어났는데, 눈썹 속에 흰 털이 있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됐다. 클라우제비츠는 8편에 이르러 전쟁 계획이 전쟁의 정치적 목표에 대한 인식 없이는 논의될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먼저, 전쟁 목표에 미치는 정치적 목적의 영향에서는, 전쟁 목표는 단순히 적을 위협하고 협상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것이다. 곧 세 치 혀로 싸우는 설전(舌戰)이요, 전쟁터는 테이블이다. 이것은 총과 칼이 부딪치는 절대전쟁이 아닌 전쟁과 협상을 병행하는 절반의 전쟁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다고 했다.

 다음으로 ‘전쟁은 정치의 수단’에서 전쟁은 온 힘을 다해 찌르는 전투용 칼(the battle-sword)이며, 정치는 이 칼을 보통 가벼운 칼(a light-handy rapier)로 만들어버리는 속성을 지닌다고 했다. 정치가 전쟁 성격을 변화시키는 표현이다. 이어 ‘전쟁을 낳은 것은 정치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관점이 군사적인 관점에 종속되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정치는 이성이고 전쟁은 단순한 도구이며, 그 반대는 아니다. 따라서 군사적인 관점이 정치적인 관점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끝에서 전쟁은 반드시 정치적 성격을 지녀야 하며 정치의 척도로 바라봐야 한다면서 전쟁은 정치 수단이라는 불후의 명언을 남겼다. 전쟁과 정치 관계처럼 빙상의 스피드에 아름다움과 율동을 가미한 아이스댄싱과 밀접한 관계다.



 ● 아이스댄싱과 피겨스케이팅은

 아이스댄싱은 페어와 유사하지만, 남자선수가 여자선수를 어깨높이 이상 들어 올릴 수 없고 연기하는 동안 남녀선수가 양팔 길이 이상 떨어지면 감점이 되는 등 차이가 있다. 지난 소치에서는 팀 경기가 처음 열렸다. 남녀 싱글·페어·아이스댄싱의 4팀 6명의 선수가 참가해 프리스케이팅 점수로 경쟁한다.

 한편 피겨스케이팅은 싱글스케이팅과 아이스댄싱 등 4개 종목이다. 피겨스케이팅은 강철 칼날이 만들어지면서 탄생했다. 미국인 잭슨 헤인즈가 이 아이디어를 냈으나, 당시 남북전쟁이 한창이라 주목받지 못하고 1864년 스웨덴 스톡홀롬에 정착했다. 그 후 베엔나 왈츠를 추던 여인들에 의해 확산됐고, 1896년 처음 피겨선수권대회가 개최됐다. 스케이팅 주요기술은 점프와 스핀·스파이럴 등이다. 피겨스케이팅은 이러한 기술의 연속이다.

 페어스케이팅은 한 쌍을 이룬 남녀가 똑같은 동작을 취한다. 남자선수가 여자선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리프트, 남자선수가 여자선수 허리를 잡거나 손을 잡고 던져서 점프 동작을 돕는 스로 점프, 남자선수 손을 잡은 여자선수가 얼음판과 수평을 이루도록 누워서 회전하는 데스 스파이럴 동작 등이 있다. 스피드스케이팅이 힘과 기술에 의한 속도와의 전쟁이라면 아이스댄싱과 피겨스케이팅은 음악과 기술의 조화로운 말로 하는 전쟁인 외교와 유사하다.



 ● 전쟁은 총으로 하는 외교, 외교는 말로 하는 전쟁

 전쟁론에서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다’와 함께 ‘전쟁은 총으로 하는 외교, 외교는 말로 하는 전쟁’ 또한 주목할 만하다. 즉, ‘전쟁술은 최고 관점에서 보면 정치다.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대신에 전투로 하는 정치다(at the highest level the art of war turns into policy, but a policy conducted by fighting battles rather than by sending diplomatic notes).’

 지금부터 60년 전, 북베트남과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 후 제네바평화협정을 잉태(孕胎)했다. 당시 공격을 주도했던 보응우옌잡 장군은 4월 말에 미·소·영·프랑스 등 4대 강국이 인도차이나를 포함한 전후 냉전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제네바에서 모이기로 합의한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군사적인 승리를 통해 베트민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간은 10주밖에 없어 3월 13일부터 공격을 개시했고, 55일 만에 승리했다. 그로부터 북위 17도선을 연한 남북 베트남은 미군 개입으로 다시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1968년 5월부터 시작된 평화협상은 테이블 전쟁으로 시작됐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포함한 모든 대표가 평등한 자격으로 원형 테이블을 이용하자고 주장했고, 남베트남은 직사각형 테이블을 주장했다. 9개월 후 북과 남은 원형, 기타 대표는 원형 주변 사각형 테이블에서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 주도권 다툼은 6년 동안 폭격과 협상의 반복 끝에 파리평화협정으로 막을 내렸다. 차가운 혀가 뜨거운 총을 이겼다. <오홍국 정치학 박사>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