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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대화창구 튼 北 …남북 외교전쟁 시작되다

입력 2014. 09. 1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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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970년대 대미외교-뉴욕에 북한대표부 개설과 대미외교 본격 추진



 

여러 외교채널 통해美 접촉 시도했으나잇따라 협상 좌절돼
WHO 가입 계기로남북대결·대미 접근 획기적 변화 가져와

 

지난 10회에서는 북한이 미국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전개했던 이른바 ‘인민외교’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북한이 1970년대부터 미국정부를 상대로 한 대미외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푸에블로호 사건과 북한의 대미 ‘자신감’

 6·25전쟁 이후 미국과 북한이 정부 차원에서 최초로 접촉한 것이 푸에블로호 사건이 다. 양측은 억류된 미군 83명의 송환을 위해 29차례의 협상을 벌였다. 북한이 푸에블로호 사건을 ‘승리’라고 선전하는 것처럼, 이 사건을 통해 북한은 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비록 승무원 송환을 위해서였지만, 당시 미국은 북한이 내민 단 1장의 문서에 서명했는데, 북한은 그것을 미국의 ‘사죄문’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이 문서에는 미국이 기존에 부르던 ‘북한(North Korea)’이라는 명칭 대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라는 명칭이 11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확인서나 다름없었다.

 푸에블로호 사건을 통해 얻은 북한의 이 같은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무시에 대한 경험이 ‘인정투쟁’의 정치적 동기가 된다는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말처럼, 그동안 무시 받았던 북한의 인정투쟁의 전개였는지 모르나, 아무튼 북한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활발한 대미접촉을 의도적으로 시도하게 된다.

1970년대 북한의 대미 접근 시도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북한의 첫 번째 대미 접촉 시도는 1971년 1월에 있었다. 북한은 루마니아 부통령을 통해 미국 정부에 북미 간 직접 접촉을 제의하였다. 당시 루마니아는 공산주의 국가로 북한과 가까웠지만, 미국과도 관계가 좋았다. 닉슨 대통령은 1969년 8월 루마니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결국 루마니아가 양국의 메신저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은 1971년 7월 미중 접촉을 위해 중국을 비밀 방문한 미국 대통령 안보보좌관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총리와의 회담에서 밝혀졌다. 이후 북한은 1971년 10월 키신저의 2차 방중 때에도 8개 항의 요구사항을 중국 측을 통해 미국에 전달했다. 주요 내용은 주한미군 철수와 유엔에서 한반도 문제 토의 시 북한대표의 참석 요구였다.

 1972년 2월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베이징에 미국 연락사무소가 개설되면서 북한의 대미 접촉시도는 더욱 증가하였다. 1973년 8월 27일 저녁, 드디어 베이징 북한대사관의 이재필 대리대사와 1등 서기관 신지도가 미국 연락사무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미국은 격을 낮추기 위해 부소장이 북한측 인사를 맞이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북한은 이 회동이 북한과 미국 외교관의 첫 만남이라며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이후 북한과 미국 외교관들의 접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1978년 8월 1일 미 국무부는 지금까지 미국과 북한이 다섯 차례 직접 접촉을 가졌음을 밝혔다. 그러나 접촉 시기, 장소, 이유와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

 한편, 북한은 이 당시 미국 정부에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는 서한을 보냈다. 1974년 3월 25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이름으로 미 의회에 북미 간 불가침선언, 유엔군 철수 등을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공식적인 대미 협상 제안이었다. 북한은 이전까지 한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는데, 이제는 그 대상을 미국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후에도 북한은 여러 경로로 미국정부에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였다. 1975년 일본의 우쓰노미아 의원, 1976년 파키스탄의 부토 대통령, 1978년 유고 티토 대통령을 통해 북한은 자신들의 평화협정 체결 의지를 피력했으나, 미국의 거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北, 세계보건기구 가입과 뉴욕대표부 설치

 북한은 1973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WHO) 회원국이 되었다. 유엔 규정에는 유엔의 전문기구 회원국에게 유엔의 옵서버(Observer) 자격을 부여하도록 되어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스위스 제네바와 뉴욕에 상주대표부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제네바 대신 뉴욕에 옵서버 사무실을 설치하고, 15명의 외교관을 1973년 9월 4일 뉴욕에 파견하였다. 6·25전쟁 이후 북한 외교관이 처음으로 미국에 공식 입국하게 된 것이다. 이후 뉴욕대표부는 현재까지 북한의 대미외교 거점이자 북미 간 대화창구로 이용되고 있다.

 북한의 뉴욕대표부 설치는 남북한 대결과 북한의 대미 접근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북한이 유엔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되면서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에서는 한반도 문제에 관한 서로 다른 2개의 결의안이 동시에 통과되기도 하였다. 이후부터 유엔에서 남북한 외교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북한 외무상의 15년 만의 미국방문

 9월 중순 북한 외무상 리수용이 유엔총회에 참석차 미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한다. 북한 외무상으로서는 1991년 유엔 가입 이후 세 번째이자 1999년 백남순 외무상 방문 이후 15년 만의 일이다. 특히 김정은 등장 이후 첫 방문이다. 언론에서는 유엔총회 참석뿐 아니라 미국과 북한 간에 접촉이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 8월 16일에는 미 고위 당국자를 태운 군용기가 1박 2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북핵과 미사일, 그리고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3명의 미국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색하는 듯하다.

 최근 일련의 북한과 미국관계를 지켜보면, 마치 1970년대 북한의 대미 외교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대한민국 입장에서 북한과 미국이 어떤 접촉을 진행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외교적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혹여 그것이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술이라면 우리는 단호히 반대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전개되는 북한과 미국의 접촉을 면밀히 검토한 후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숙제가 우리에게 남아있다.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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