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반도군사리포트

남침·패전 은폐하려는 역사 왜곡이자 술책

입력 2014. 07. 1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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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정전일을 전승절로 둔갑시킨 북한의 억지


기습한 북한, 파죽지세 남하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북 후퇴 거듭하자 중국도 참전  주요 부대 지휘권 中에 넘겨줘

 

무력 공산화 통일 실패

김일성, 초전 제외하면 전쟁 지휘 제대로 못한 셈 ‘정전일=전승절’ 당치도 않아

 

 



 ● 북, 한반도 적화통일 실패하고 정전 맞아

 

 근대 전략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과거 주요 전쟁사를 보면 전쟁의 승패에 따라 정치적 목적 달성 여부가 갈렸는데 이를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전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기 위해 6·25전쟁을 일으켰으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정전을 맞았다. 그런데도 북한은 1953년 7월 27일 정전일을 전승절로 기념해 오고 있다. 이는 남침과 패전을 은폐하기 위한 역사 왜곡이며 술책에 불과하다.

 북한은 전쟁 도발 초기인 1950년 7월 4일, ‘전반적 무력을 통일적으로 장악·지휘하는 기구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를 조직할 데 대하여’ 제하의 결정을 통해 최고사령부를 신설하고 김일성을 최고사령관에 추대했다. 김일성은 곧바로 전선사령부를 조직하고 당시 부수상직에 있던 김책 대장을 사령관에, 현 인민무력부의 전신인 민족보위성 참모장 강건을 총참모장에 임명했다.

 

    이에 따라 군사지휘체제는 인민군 최고사령부→전선사령부→제1·2군단사령부로 설정됐다. 기습을 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해 우리나라는 1950년 7월 중순에 하동-김천-안동을 연하는 선까지, 그리고 7월 말에는 마산-대구-포항 선까지 밀렸다. 64년 전 이맘때쯤 우리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 속에 있었다.


● 7월 말 마산-대구-포항 선까지 밀려


 이 무렵 유엔에서 참전 결의가 있었고,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효율적인 작전을 위해 7월 18일부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이양됐다. 유엔군의 지휘하에서도 북한군의 공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에 성공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에는 38선을 돌파했다. 10월 말에는 압록강 변의 초산까지 진격하고 11월 말에는 혜산진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뤘다. 북한군이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10월 8일 참전하기로 했다.

 

   참전 초기 중공군은 북한군과 연합사를 구성해 전쟁을 수행하고자 했으나, 김일성은 본인의 위상이 손상될 것을 우려해 반대했다. 따라서 중공군과 북한군은 각각 독립된 지휘체계를 갖고 작전을 하게 됐으나 협조 된 공격이 이뤄지지 않았고, 심지어 양군 간에 오인사격을 하는 등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통일된 지휘체계가 필요했다. 김일성은 하는 수 없이 중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2월 4일부로 조·중 연합사령부를 구성하게 됐다. 사령관 겸 정치위원에 중공군 펑더화이(彭德懷)가 임명되고 부사령관에는 김웅이, 북한 측 정치위원에는 박일우가 임명됐다.


● 전투 부대 주요 지휘권 중공군에 넘겨


 최고사령관으로서 군권을 수중에 넣고 있었던 김일성은 조·중 연합사령부 설치로 주요 전투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중공군에게 넘겨주게 됐다. 이로써 김일성은 후방지원 외에는 작전에 직접 관여할 수 없게 됐는데, 이러한 체제는 정전 시까지 지속됐다.

 

   이에 따라 김일성의 군권이 크게 위축됐을 뿐만 아니라 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서의 위신도 큰 상처를 입었다. 더 큰 문제는 조·중 연합사 한측 요원들이 자신의 측근인 만주파가 아니라 김웅·박일우 등 주로 연안파들로 구성됐다는 점이다.

 

   그 결과 무정 등 연안파의 입지는 강화된 반면, 김일성의 만주파는 일대 위기에 처했다. 자칫 잘못하면 북한 내에서 김일성 자신의 정치생명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된 것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김일성은 전쟁 동안 본인 중심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데 집중해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는 정적이었던 연안파 거두 무정, 소련파 허가이, 국내파 박헌영 등을 제거할 수 있었다.

 

   김일성이 전쟁 초기에는 당 내에서의 지배권이 약했는데, 이들을 제거함으로써 전후에는 군권과 더불어 당권마저 강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전에서의 패배로 군 지휘권을 상실한 김일성이 전후에는 당권까지 쥐게 됐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정전 협정에 따라 한반도 통일 논의를 위해 1954년 6월 제네바에서 회담이 열렸는데, 북한의 외무상 남일은 한반도 내의 모든 외국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중국에 중공군을 조기에 철수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중공군 철수는 1958년 4월 말부터 시작돼 연말까지 완료됐다. 김일성이 중공군을 부랴부랴 철수시킨 데에는 대략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중국의 북한 정치 개입을 막고 전쟁 기간 추락한 김일성 자신의 위상을 조기에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중공군이 주둔해 있으면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정적인 연안파와 소련파를 완전히 축출하거나 위상을 끌어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중공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김일성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됐던 것이다.

 

   둘째는 남한 지역에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으면 제2의 6·25전쟁을 일으킨다고 해도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서 미군의 철수를 유도하고자 했다. 이후 북한의 대내외 정책은 대남우위의 군사력을 유지한 가운데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유사시 무력 적화통일의 여건을 구비하는 데 모아졌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3대 혁명역량 강화를 제기하고 이에 진력했다. 대남우위의 군사력 유지 정책은 4대 군사노선, 김정일의 선군정치 그리고 김정은 시대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장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아울러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를 위해 북미 평화협정 체결, 한미동맹 해체 등을 지속적으로 주장해 오고 있다.


● 김일성, 자신이 이끈 전쟁에서 완패

 


 결론적으로 김일성은 초전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전쟁 지휘도 못해 보고, 김일성이 이끈 전쟁에서는 완전히 패배한 상태에서 북한군에 대한 지휘권을 중공군에 넘겨줬다.

 

   이러한 체제가 정전 시까지 지속됐으므로 김일성의 전쟁은 패배로 끝났음은 물론, 전쟁을 통해 전 한반도를 공산화 통일하겠다는 정치적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다. 김일성이 전후 북한에 대한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게 된 것만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중공군의 선물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북한이 패배한 전쟁의 정전일을 전승절로 둔갑시켜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는 것은 당치도 않으며 북한 주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김정은은 연평도 포격사건을 ‘정전 이후 가장 통쾌한 싸움’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북한 정권의 승전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큰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적화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으나, 결코 전승의 기쁨을 맛보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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