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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가용 전력 모두 이용해 한국 지원” 약속

김병륜

입력 2013. 12. 1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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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주일미군과 한미동맹


해·공군 비중 높은 주일미군은 주한미군과 상호 보완관계 일본 소재 유엔사 후방기지는 미군 증원부대의 허브 역할


“척 헤이글 미합중국 장관은 주한미군 수를 현 수준으로 유지하고 전투준비태세를 향상시키겠다는 공약과 한반도에 배치된 전력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가용한 미군 전력·능력을 사용해 한국을 방위한다는 단호하고 확고한 공약을 재강조했다.”

 이상은 지난 10월 2일 김관진 국방부장관과 헤이글 미 국방장관이 서울에서 제45차 안보협의회의(SCM)를 가진 후 발표한 공동성명 제4항의 일부다. 유사시 한반도에 배치된 주한미군(U.S. Forces Korea : USFK)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이용 가능한 미군 전력을 한반도에 투입해 한국을 지키겠다는 약속이다.

 SCM 공동성명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은 주한미군 차원이 아니라 미 본토나 제3국에 주둔 중인 미군, 다시 말해 증원전력까지 포함한 좀 더 큰 차원에서 담보되고 있다. 이때 이론적으로는 세계 어느 곳에 주둔하는 미군이라도 한국을 지원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전쟁 초반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전력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주일미군(United States Forces Japan : USFJ)이다. 거리를 고려할 때 다른 어느 곳의 미군보다 가장 신속하게 한국으로 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일본의 유엔사 후방기지

 일본 주둔 미군은 6·25 당시 한국의 안보에 결정적 기여를 했고, 그 같은 상황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 핵심 연결고리는 유엔사 후방기지다. 일본에 주둔하던 유엔군사령부가 1957년 7월 1일 서울로 이전하면서 일본 자마기지에 유엔사 후방지휘소를 창설했다. 유엔사 후방지휘소는 2007년 11월 요코다 기지로 이동해 지금도 일본 내 유엔사 후방기지를 통해 한국의 유엔군사령부 작전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일본 본토의 유엔사 후방기지는 요코다 공군기지, 자마 육군기지, 요코스카와 사세보 해군기지 등 총 4곳에 있다. 오키나와에도 가데나 공군기지, 후텐마 해병항공기지, 화이트비치 해군기지 등 3곳이 유엔사 후방기지다. 이들 유엔사 후방기지는 대부분 주일 미군의 기지로도 사용되며, 유사시에는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증원전력의 집결·대기장소로도 활용된다. 다시 말해 유사시 한국을 돕기 위한 미군 증원부대를 한반도로 투입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허브(HUB)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유엔사 후방기지다.
 

◆ 주일미군 주요 부대

 유엔사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하는 요코다 기지에는 미 5공군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다. 역시 유엔사 후방기지인 요코스카는 미 해군 7함대의 핵심기지 역할을 맡는 곳이다. 사세보와 화이트비치는 7함대 등 미 해군의 기항지로 활용한다. 가데나에는 미 공군 18비행단 소속 F-15 전투기 등 실질적 전력이 전개하고 있다.  

 후텐마에는 미 해병 항공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나 주일미군 재배치와 관련해 기지의 미래가 다소 유동적인 상태다. 주일미군 중에서 육군 전투부대는 거의 없기 때문에 자마기지에도 미 육군전투부대는 주둔하지 않는다. 다만 유사시 동북아 지역으로 전개되는 미 육군증원부대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군수지원능력을 갖추고 있다.

 오키나와의 미 3해병원정군(MEF)이나 31해병원정대(MEU)는 유사시 가장 신속하게 한국을 지원할 수 있는 지상군 중 하나라는 점에서 한국의 안보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 해병대와의 연합훈련에 가장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다름 아닌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대 병력들이다.

 
◆ 주일미군의 특성

 미 국방부가 밝힌 통계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주일미군의 전체 규모는 3만5688명이다. 이 같은 주일미군 병력 규모는 아프가니스탄 등 임시 병력 투입 지역을 제외하고 상시 해외주둔 미군 중 국가별 규모 2위에 해당한다. 미군 상시 해외 주둔 병력 규모 1위는 5만 명 내외 수준인 독일이고, 2만8000여 명으로 알려진 한국의 주한미군은 3위에 해당한다. 최근 독일 주둔 미군 규모가 감소 추세이기 때문에 주일미군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더 높아질 전망이다.

 주일미군 중 해병대가 1만7000여 명으로 가장 많고, 공군이 1만2398명으로 그다음을 차지한다. 육군은 2541명에 불과해 1개 연대급도 되지 않는다. 해군의 경우 3740명으로 돼 있는데, 이 병력은 해군육상기지에 근무하는 병력만 포함한 수효일 뿐 실제로 7함대 소속으로 전진배치된 함정에 근무하는 사람은 그보다 몇 배나 더 많다. 당장 요코스카에 모항을 둔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함에 근무하는 인원만 6000명을 넘나든다. 실제 일본에 거점을 둔 미군은 3만5000여 명보다 더 많다는 의미다.

 이처럼 주일미군은 공군과 해군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 지상군도 전략적 기동성이 매우 우수한 해병대 위주라는 점에서 주한미군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미 육군 대장이 사령관을 맡은 주한미군과 달리 공군 중장인 미 5공군사령관이 주일미군사령관 직을 맡고 있다.

 이와 관련, 한 군 관계관은 “해·공군 전력 비중이 높은 주일미군은 육군 전력의 비중이 높은 주한미군과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유사시 한국의 안보의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6·25전쟁과 주일미군-가장 먼저 출동한 부대는 일본 주둔 미 육군 24사단

 

6·25전쟁 당시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미군들도 한국과 일본에 대한 구분 없이 큰 틀에서는 하나의 조직으로 움직였다. 1950년 7월 24일 창설된 유엔군사령부(UNC)는 일본 도쿄에 주둔하고 있는 미 극동사령부(Far East Command : FAC)를 모체로 만들어졌다.

도쿄에 사무실을 둔 미 극동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을 겸임했고, 그 예하의 참모 조직도 사실상 하나의 조직이 두 가지 역할을 하는 식이었다.

 예하부대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 7월 15일 새벽 3시 15분 가장 먼저 한국 출동명령을 받은 미군부대는 일본 주둔 미 육군 24사단이었다.

6·25에 참전한 미 7·25사단과 1기병사단도 모두 일본에 주둔하던 주일미군이었다. 미 8군사령부도 원래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이었다. 육군 군단급 부대인 미 1·9·10군단 등도 모두 원래 주일미군이었거나 일본에서 준비를 한 후 한국으로 투입됐다. 미 육군부대가 일본에 주둔하다 한국으로 출동했다면 미 공군과 해군은 일본이나 기타 아시아 지역에 거점을 둔 상태 그대로, 한국에서 작전을 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1950년 북한군의 선제 남침으로 전세가 불리했을 때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작전할 만한 기지는 많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미 공군 전력이 대구와 사천 등에 전개하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전력은 일본에 기지를 둔 상태에서 대한해협을 건너와 한국을 지원했다.

 공군 전력의 실질적 주력도 일본 주둔 5공군이었고, 여기에 필리핀의 13공군이나 괌과 오키나와의 20공군 소속 폭격기도 힘을 보탰다. 해군의 경우 당시 기준으로 필리핀에 기지를 두고 있던 미 7함대와 상륙전 능력을 보유한 일본의 99기동부대(극동 상륙부대), 봉쇄작전을 책임진 95기동부대 등이 한국 주변에서 활약했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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