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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의지에 감동”

입력 2013. 11. 1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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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휴전보다 승리를 원했던 밴 플리트


美 뉴스위크 표지인물 소개·라이프 誌에 휴전 관련 기고  부임 8일째 중공군의 춘계공세…국군6사단 전폭 지원

 

 

 

 ● 뉴스위크 표지인물

 공산주의자들은 1951년 춘계 대공세의 패배로 전력(戰力)에 심각한 타격을 입자, 휴전을 제안했다. 제안자는 중공이나 북한이 아닌 공산주의 종주국이자 6·25전쟁을 조종한 소련이었다. 1951년 6월 23일, 말리크 주유엔 소련대사는 휴전을 제안했고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그때 밴 플리트의 심중은 어땠을까? 1951년 10월 29일 자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는 표지인물로 밴 플리트를 선정하고, ‘휴전은 가장 힘든 전투다’라는 제목 아래 그의 소감을 보도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휴전회담이 시작됐을 때, 밴 플리트는 서울 제8군사령부의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종군기자들에게 ‘지금은 본인이 입을 다물 때입니다. 정치적인 이슈는 내 소관이 아니니까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회담은 그에게 그 어느 전투보다도 더 큰 어려움을 안겨줬다. 그에게는 1)공산군을 압록강까지 쫓아내는 강력한 공세 2)앉아서 기다리는 방법 3)제한적인 공세 등 세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이날 오후, 밴 플리트가 선택한 것은 제3안이었고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NEWSWEEK’, 17~18쪽)
 

● “양심상 나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그러나 뉴스위크의 기사는 결코 밴 플리트의 의중(意中)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지휘관으로 상명하복에 충실했을 뿐이다. 퇴임 후인 1953년 5월 11일과 18일 그는 미 주간화보지 ‘라이프’(LIFE)에 ‘한국에 관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제8군사령관 당시 다하지 못한 말들을 솔직하고도 시원하게 쏟아냈다. 1) ‘양심상 나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2) ‘한국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란 소제목으로 구성된 총 2부 21쪽의 밴 플리트 기고문은 한국 사랑이 넘치는 명문(名文)이다. 글의 서두에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951년 봄, 내가 제8군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한 후 6주일은 미 육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였으며, 한국전쟁에서 우리의 사기가 최고로 충천했던 시기다. 그때 우리 정부의 고위 정책 결정자들이 개입해서 우리에게 더 이상 전진하지 말라고 명령함으로써 전투의 정체상태와 길고 지루한 휴전협상이 시작됐다. 1951년 5월 이후 우리 정부의 정책을 추적해보면 우리가 한반도에서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서글픈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는 중공군보다도 압도적으로 우세한데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할 휴전을 택하는가? 원한다면 적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는데 왜 다수의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휴전으로 평화를 이뤄야 한다고 극성스레 고집하는가?” (‘LIFE’, 1951년 5월 11일, 127쪽)

 그리고 휴전회담 서명을 앞둔 미국 정부에 휴전 대신 군사적인 승리를 강력히 촉구하면서 글을 맺는다.

 “우리는 침략자들에게 군사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것이 우리 손자들을 전투와 그로 인한 패배로부터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승리는 대가가 따른다. 전쟁은 항상 희생이 따르는 것이며 질질 끄는 것보다는 빨리 끝낼수록 더 낫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밀려 후퇴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는 패배자가 된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LIFE’, 1953년 5월 18일, 172쪽)

 특히 이 기고문에서 밴 플리트는 군사적인 승리를 촉구하는 이유가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의지에 감동했기 때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글에는 그의 마음을 움직인 세 가지 사례가 차례로 언급돼 있다.

즉, 1)파괴와 잿더미 속에서 일하는 노점상 할머니(11월 11일, 본 연재물 제6화) 2)6사단(사단장 장도영 장군)을 비롯한 한국군 장병들의 불굴의 투지 3)개인의 안락보다는 자유국가 건설을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언행 등이 그것이다.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한국군 6사단의 감투 정신과 전공

 “한국에 부임한 지 8일째 되던 날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개시됐다. 당시 미 군단 사이에 위치했던 한국군 6사단이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자 미군들은 한국군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성급한 결론이었다. 당시 경무장한 한국군 6사단이 공산군 4개 군(軍·2개 이상의 군단 편제)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1만 명의 장병 중 6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함으로써 잔여병력은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6사단의 패배를 치욕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았다.

 전투가 진정되자 나는 6사단의 병력을 충원해주고 중화기도 제공했다. 또한 추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장도영(1923~2012) 사령관은 패배의 수모를 만회하고자 휘하의 장교 몇 명과 황호(黃虎·Yellow Tigers)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단 한 치의 땅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엄숙히 서약하고 명예회복을 결심했으며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한 달 후인 1951년 5월, 우리가 반격을 개시했을 때, 한국군 6사단은 미 7사단과 24사단의 사이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거친 산악지형에서 중부전선의 그 어느 부대보다도 적에게 더 큰 패배를 안겨줬다.

 여러분이 한국군에 대해 무엇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한국군을 위대하고 훌륭한 동맹이라고 믿는다. 그들에게 충분한 훈련을 시키고 전투에서 버틸 수 있는 만큼의 충분한 화력을 제공할 때까지는 그들의 전투역량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LIFE’, 1951년 5월 18일, 157~158쪽)


 ●밴 플리트와 이승만 대통령

 “2년간 나는 이승만 대통령과 1주일에 한 번씩은 전선을 시찰했고 군사훈련소를 방문했다. 추운 겨울에 지프로 이동하면서 나는 죄송하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는 손사래를 치며 늘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 대통령은 일본 강점기 때 지어진 부산의 아주 불편한 집에 살며 개인의 안락을 위해서는 절대로 국고를 낭비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국 관리들이 대통령 전용기 구입을 건의하자 그런 돈이 있으면 적에게 퍼부을 포탄을 사라고 단호히 거부했다.

 지난 9년간 여러 나라 지도자를 만나봤지만 이 대통령이 단연 최고였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침탈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지독하게 가난한 삶을 누리다가 이승만 정부에서 최초로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그러나 미국을 증오하고 지주를 살해해 전리품을 함께 나눠 갖자고 종용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공세에 직면하게 됐다.  

 이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공산주의 위협의 본질을 이해시키고 용기와 인내심을 고취했다. 이를 통해 국민에게 충분한 교육의 기회가 없었고 사회적 규율이 부족했던 한국을 공산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 최강의 나라로 만들었다.” (‘LIFE’, 1953년 5월 18일, 162~164쪽)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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