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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웨이<제8군사령관> 후임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싣다

입력 2013. 11. 0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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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사주간지 TIME의 표지 인물


부임 일주일 만에 공산군의 서울 탈환 대공세 막아  1949년에 이어 두번째로 TIME 표지 인물로 소개

 

 

 

 

●한국전쟁 지휘봉을 잡다

 1950년 7월 15일, 그리스에서 귀임한 밴 플리트는 한 달 후에 모병, 교육훈련, 예비군과 학군단 운용 등이 주업무인 미 제2군사령관에 취임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선에 많은 병력지원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유럽과 나토를 선호하는 클라크 장군(6·25휴전협정에 서명한 인물) 등 다수의 군부 인사들은 그런 요구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워싱턴의 분위기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하자 빨간불이 켜졌다. 이 와중에 12월 23일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해 리지웨이 장군이 부임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1951년 4월 11일에는 맥아더 장군이 트루먼 대통령 등 워싱턴 지휘부와의 불화로 보직 해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트루먼 정부는 맥아더 후임으로 리지웨이를 유엔사령관에, 리지웨이 후임으로 밴 플리트를 제8군사령관에 임명했다. 리지웨이는 육사 선배인 밴 플리트를 지휘하게 되는 것을 거북해했지만, 그리스 내전을 성공적으로 처리한 밴 플리트에게 각별한 신임을 보인 트루먼 대통령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맥아더 장군이 보직 해임되던 날, 플로리다에서 휴가를 즐기던 밴 플리트는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의 전화를 받았다. 즉시 한국전선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즉시란 다음날 출국을 의미했다. 4월 12일 밴 플리트는 워싱턴에서 콜린스 총장을 예방하고, 육군참모들로부터 한국전 상황과 제8군에 관한 브리핑을 받은 후, 그날 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는 아내와 작별의 키스를 하고!


●부임 1주일 만에 공산군 대공세 시작

 1951년 4월 14일, 대구 공항에 도착한 밴 플리트는 오후에 제8군사령부에서 리지웨이와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이·취임식을 가졌다. 이튿날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고, 한국군 지휘권과 전쟁의 승리에 필요한 자원 사용에 관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서 밴 플리트는 연민의 정보다는 존경심을 갖게 됐다. 자기보다 17살 위인 77세의 노()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반드시 몰아내겠다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것을 보고 탄복했기 때문이다. 이후 두 사람의 길고도 친밀한 우정은 오늘의 한국을 있게 만든 바탕이자 동력(動力) 중의 하나였다.

 밴 플리트가 지휘권을 인수할 당시 제8군의 지상군 병력은 한국군 20만 명을 포함해서 총 41만7000명이었다. 또한 18개 미 공군부대가 참전했으나, 한국에 기지가 있는 부대는 3개뿐이었다. 반면에 공산군은 한반도에 50개 사단 70만 명, 만주에 50만 명의 추가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중공군이었다. 이 수치에는 7개 군단의 북한군이 포함됐으나, 군단마다 병력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 243∼245쪽)

 맥아더의 해임과 유엔군사령관 및 제8군사령관의 교체는 공산군에게 절호의 공격 기회였으며, 중공군의 미그-15 전투기가 평양까지 남하해서 미군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대공세의 예고였다.

 1951년 4월 22일 밤, 공산군의 대공세가 개시됐다. 궁극적으로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이 공격으로 한국군 제6사단과 영국군 1개 대대가 큰 손실을 입었으나, 유엔군은 서울을 사수했을 뿐만이 아니라, 공산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줬다. 이는 적 사상자수가 약 7만 명인 반면, 아측은 약 7000명이었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 250쪽)


●시사주간지 TIME의 표지 인물

 유력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밴 플리트가 한국에 부임한 지 꼭 한 달이 되는 1951년 5월 14일, 그를 표지인물로 소개했다. 그리스에 근무할 때인 1949년 5월 23일자의 표지인물이었으므로 두 번째였다.

 밴 플리트가 지휘하는 제8군이 공산군의 대공세를 저지한 후 작성된 커버스토리의 일부를 발췌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달 한국에 도착한 밴 플리트 중장의 첫마디는 직업군인다웠다. ‘이곳은 전투하기 위한 여건이 좋아 보입니다.’ 리지웨이는 업무를 인계하고 도쿄로 떠나면서 ‘장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테니 소신껏 일하세요’라고 말했으나 밴 플리트는 ‘기동전략으로 아군의 생명을 최대한 구하고, 화력으로 적을 최대한 사살한다’는 리지웨이의 전략을 따르고 있다.

 밴 플리트는 부임 후 첫 번째 공산군의 공격을 무산시키고 그들에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부하 장병들의 ‘대승’을 칭찬하면서도 조만간 패배를 만회하기 위한 적의 대규모 도발이 또 있으리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지휘권을 받자마자 재빨리 제8군의 전략·전술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그는 며칠 전 어느 연대장과의 대화 중에 곰의 발처럼 큰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귀관의 제2대대는 아직 이곳을 사수하고 있는가?’ 연대장은 사령관이 전선 상황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예, 장군님, 물론입니다.’

 지난 주 리지웨이는 전선시찰을 위해서 대구에 도착해 자신의 전용기편으로 밴 플리트와 함께 미 제1군단을 방문해 밀번 군단장과 만났다. 이후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는 연락기로 갈아타고 4시간 동안 한국전선의 대부분을 시찰하며, 8개 사단·군단장들과 전황에 대해서 의견을 나눴다. 이어서 둘은 대구로 이동해 이승만 대통령을 잠시 예방한 후 리지웨이는 도쿄로 떠나고 밴 플리트는 참모회의ㆍ브리핑ㆍ결재 등 사무처리, 주요인사 및 언론과의 인터뷰 등 힘든 업무가 산적해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밴 플리트는 전임자 워커ㆍ리지웨이가 살았던 대구의 단층집에 기거한다. 그는 새벽 5시 전에 기상해 면도하고 커피를 마시며, 아침식사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날 밤 미뤄놓은 업무 처리를 한다. 사무실은 학교 건물을 개조한 곳으로 빨강색과 청색의 빛바랜 양탄자가 바닥에 깔려있고, 벽은 온통 전술 지도들로 장식돼 있다.

 밴 플리트는 폼 잡기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건장한 체격에서 힘과 자신감이 느껴진다. 트레이드마크인 상아 손잡이의 권총을 찬 그는 지난 2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비에 흠뻑 젖은 채 덮개가 없는 지프를 타고 전선을 시찰했으며 하루는 텐트에서 밤을 지새웠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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