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북한돋보기

60년대 말~70년대 초 대대적 해체작업…일부만 남아

입력 2013. 02. 2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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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한의 문중을 아십니까?


 본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 주민의 풍습·관습을 소개하는 ‘북한 돋보기’ 코너를 신설합니다. 합참 민군작전부의 협조를 얻어 게재하는 ‘북한 돋보기’는 북한군 상위 출신 박은철 합참 전문연구원이 집필, 북한 주민의 생생한 생활상을 소개합니다.



 문중이란 성과 본이 같은 가까운 집안을 말하는데 북한에도 여러 지역에 문중이 존재한다. 6·25전쟁 직후에는 문중 규모가 아주 컸으며 세력이 큰 문중에서는 그 지역의 공공행정이나 관리 일꾼들을 선출해 지역 중대사를 결정하기도 했다.

 북한은 이러한 문중이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이들을 서로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대대적으로 해체작업을 했다. 그렇다고 현재 북한사회에서 문중의 실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과 분리정책으로 비록 규모와 세력은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 문중의 명맥을 근근이 이어오는 가문도 남아 있다.

 정치부 청년지도원으로 일할 때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체험한 이야기다. 2002년 10월께, 군관학교로 추천된 인원의 신원확인을 위해 길주군에 있는 농촌마을로 가게 됐다. 그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박씨 문중이었는데 군관학교로 갈 그 청년의 아버지는 이 마을의 박씨 문중에서 최고 어른이었다. 집에 도착해 대문을 여는데 집안이 온통 잔칫집 분위기였다. 집 마당에서는 돼지를 잡고, 부엌에서는 여인네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고 의아했는데 아들이 소속된 부대 군관이 와 아들이 온 것처럼 생각해서 한턱낸다는 것이었다. 어찌 됐든 그날 저녁 그 마을은 나로 인해 마을 잔치가 열린 셈이었다. 술잔이 여러 순 돌아가자 삼촌·고모·이모를 비롯해 사촌 아가씨들까지 와서 술을 따라 줬다. 리 관리위원회 부위원장부터 시작해 작업반장·분조장, 심지어 학교 부교장과 리 진료소 의사까지 문중에 속한 자손들이었다. 그때 후한 대접을 받아서인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처럼 북한에도 아직 문중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도시를 제외한 농촌지역에서는 문중이 아니더라도 형제·친척들이 단합하고 연대하는 관습이 여전히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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