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의병서

<219>책중일록

김병륜

입력 2012. 10. 16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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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만주족 기병에 참패…그 교훈을 얻다


참전 문신 이민환이 원정작전 전후 사정·전투 경과 기록 경계ㆍ군수ㆍ전술 등  작전 실패 원인 집중 분석, 대안 제시
후챠전투를 묘사한 그림. 왼쪽이 만주족 기병. 오른쪽이 명과 조선군이다.                                              필자제공

 “연기와 먼지 사이로 바라보니 적 기병이 밀어닥쳐 양익을 벌리며 먼 곳에서 포위하고 둘러싸고 있었다. 좌영의 군관 조득렴이 달려와 급하게 보고했다. (강홍립) 원수가 그 고독하고 위태로움을 염려해 즉시 우영으로 하여금 구원하게 하고, 급하게 전진을 독촉했다. 좌영과 함께 진을 합쳐 막 열을 완성하려는 순간, 적 기병이 일제히 돌격해 그 기세가 비바람 같았다. 포와 총을 한 방 쏜 후 다시 장전하기도 전에 적이 이미 진중으로 들어왔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묘사는 조선 광해군ㆍ인조대의 문신인 이민환(1573~1649)이 쓴 책중일록(柵中日錄ㆍ사진)의 한 대목이다. 책중일록은 1619년 3월 명나라의 후금 공격 때 조명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이민환이 원정작전의 전후 사정과 전투경과를 기록한 책이다.

 제일 위에 인용한 부분은 당시 원정작전의 마지막 전투였던 후챠전투에서 조선군 좌영과 우영이 후금의 만주족 기병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민환은 당시 조선군은 신무기인 조총으로 중무장하고 있었지만 기병들의 신속한 돌격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참패하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회고하고 있다.

 1619년 명나라는 10여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만주족의 후금을 공격했다. 총지휘관은 임진왜란 때도 참전한 경략 양호였다. 양호는 동원 가능한 병력을 네 개 부대로 나눠 후금의 수도인 헤투알라 성을 향해 진격시켰다.

 후금의 중심부인 만주 남부는 험준한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좁은 지역에 대군을 집중시키기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10여만 명의 행군로를 분리한 후 목표지역인 후금의 수도 헤투알라 성에서 합류하는 분진합격(分進合擊)이 명군 작전의 기본 골자였다.

 이에 대항한 후금의 작전은 철저하게 각개격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누르하치는 그들의 주력부대인 8기병을 동원해 두송이 이끄는 좌익중로군을 먼저 격파했다. 이어 마림이 지휘하는 좌익북로군도 격멸했다. 이처럼 전체 전력의 절반이 붕괴하자 이여백이 이끄는 우익중로군은 회군해 버렸다. 이처럼 다른 부대의 상황을 전혀 모르던 유정 제독의 명군은 3월 4일 새벽부터 행군을 서둘렀다. 유정은 주력부대를 평지를 통해 기동시키면서도 좌우 산 능선에 별도의 정찰부대(산상후군)를 운용할 정도로 신중하게 지휘를 했지만 이날 “전방에 적군이 전혀 없다”는 보고를 받고 전 부대에 전 속력으로 행군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요동 방면의 명군을 모조리 격파한 후금의 만주족은 암바 바일러 등이 이끄는 3만여 명의 대군을 유정 제독이 공격해오는 헤투알라 남쪽 방면으로 투입한 상태였다. 정찰부대의 전방 수색이 소홀했고, 행군을 서두르느라 경계까지 소홀했던 명군은 이 같은 만주족 전력의 이동 상황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1619년 3월 4일 오전 10시 와르카시 숲을 통과하던 명군 선봉부대 1만이 좌우에서 만주족 기병의 돌격을 받아 전멸했다. 이어 명군 후속부대 1만도 앞뒤에서 만주족 기병의 돌격을 받아 전멸했다. 뒤이어 조선군 1만3000명이 포진한 후챠 들판에도 만주족 기병이 들이닥쳤다.

 조선군 좌영은 미처 진영을 옮기지도 못한 상태에서 평지에서 적 기병을 상대해야 했다. 우영이 좌영을 구원하기 위해 진을 형성하는 순간적 기병의 돌격이 이뤄졌고, 결과는 조선군 좌우영의 전멸이었다. 좌우영의 전멸을 지켜본 조선군 원수 강홍립은 결국 항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군 1만3000명에는 최소 5000명 이상의 포수, 다시 말해 화약무기 운용병력이 포함돼 있었다. 그 중 대다수는 신무기 조총을 쏘는 병력이었다. 시대 추세에 따라 신무기인 조총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건만 조선군은 참패를 피할 수 없었다.

 이민환은 책중일록과 그가 남긴 다른 저서, 장계 등에서 당시 패전의 원인에 대해 분석한 글을 다수 남겼다. 이민환은 우선 조총으로 120보(144m) 이상에서 적 기병을 죽이지 못하면 기병이 돌격해 오므로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거론한다. 조총을 1발 쏘면 재장전을 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그 사이에 적 기병이 밀어닥친다는 것.

 활은 이 거리에서 갑옷을 뚫어야 적 기병 돌격을 저지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쉽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이런 기병의 돌격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장창을 든 병사가 필요하다는 점도 거론한다. 즉 이민환은 무기 자체만으로 승리하기는 어렵고, 구체적인 상황에 들어맞는 세부적인 전술까지 개발해야 승리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 밖에 훈련이 부족한 병사로 만주족 기병 같은 강적을 상대한 것 자체가 패착이라는 분석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장기 복무 위주의 정예군인으로 조선군을 재편하자는 주장도 내놓는다. 전체적으로 군수보급이 부진해 전투 이전부터 조선군이 정상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상황도 꼼꼼하게 되짚는다.

 한마디로 책중일록을 비롯한 이민환의 기록에는 고통스러운 패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서 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몸부리친 고뇌의 흔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패전은 병가지상사’라는 말을 한다. 특정 전투의 승패보다는 패전에서 교훈을 얻어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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