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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끝>임진왜란 최초의 의승장 영규(靈圭)

기사입력 2012. 05. 01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7:56

“한 그릇 밥도 나라 은혜” 의승군 활약 촉발

영규(靈圭 : ?∼1592년 8월 말)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봉기한 의승장으로서 속성(俗姓)은 박씨이고 본관은 밀양으로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제자다.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에서 출생해 일찍이 계룡산에 입산해 수도했다. 그는 갑사(甲寺)를 비롯해 가산사(佳山寺)·보석사(寶石寺) 등에 머물면서 오랫동안 수행했다.

충청지역 승병 800여명 봉기 조헌과 청주성 탈환 이끌어 높은 호국정신으로 승리 주도 전국 승병활동 도화선 역할
영규 영정.
영규 순절 사적비.
 
공주 월암리에 있는 영규 묘소.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영규는 공주 갑사 청련암에 있었는데, 전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선장(禪杖)을 갖고 무예를 닦았다고 한다. 영규는 키가 건장하고, 지략과 무리를 거느리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영규의 학식과 무예가 높음을 알고 공주목사였던 허욱(許頊)이 영규로 하여금 의승군을 모집해 조헌(趙憲)을 도와주라 했다고 한다.

 이후 영규는 승병 300여 명을 모집해 군진을 갖춘 뒤 다시 각 사찰의 승려들에게 “우리들이 이번에 의병을 일으킨 것은 조정의 명령 때문이 아니다. 만약 죽음이 두려운 자는 우리 의군에 들어오지 마라” 하고 격문을 보내니 충청 지역의 사찰 승려들이 앞을 다퉈 의승군에 편입됨으로써 병력이 800여 명에 달했다.

 영규가 승병을 일으킨 시기는 기록상으로 분명하지는 않지만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볼 때 5월 중순 이후 7월까지의 사이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영규는 임진왜란 때 봉기한 여러 의승군 중에서 가장 먼저 봉기했다. 그가 의병을 일으키면서 “한 그릇의 밥도 다 나라의 은혜다”라고 외친 것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영규는 이후 공주를 중심으로 승병을 이끌고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청주성 공격을 계획했다. 청주성은 충청도의 군사적 요충지이나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이 이끄는 관군이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졌고, 이후 관군에 의한 청주성 탈환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7월 말 영규는 800여 명의 의승군을 이끌고 안심사를 거쳐 옥천 가산사에서 승병을 추가 모집해 대규모의 의승군을 편성한다. 이후 청주성으로 진격해 일본군과 대치하면서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과도 긴밀하게 연락을 취했다. 이 무렵 청주성에는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의 7000 병력 중의 일부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의병과 관군이 합세해 청주성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나 관군은 잇달아 패퇴해 후퇴함에 따라 오직 영규만이 외롭게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즈음 조헌이 영규의 청주성 대치 소식을 듣고 의병들을 이끌고 곧바로 청주성으로 왔다.

 8월 1일, 영규와 조헌이 이끄는 3600여 명의 의승병과 의병, 관군의 연합군은 일제히 청주성을 공격했다. 하루 종일 전투가 계속됐고 의승병과 의병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본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의승군과 의병의 전의(戰意)가 높아 생각보다 전투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날 밤에 청주성을 버리고 탈주해 3개월 동안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던 청주성은 회복됐다.

 청주성 탈환 전투에서 의병과 의승군들은 승리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영규와 조헌의 탁월한 지도력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호국정신으로 무장한 굳은 정신력이 큰 승리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전투는 많은 관군과 의병에게 용기를 줬으며, 숭유억불정책으로 위축돼 있던 승려들이 구국의 선봉에 나서 이후 의승군들의 활약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영규와 조헌이 이끄는 의승군과 의병은 사기충천해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근왕코자 했으나 충청도 관찰사의 방해로 흩어지고 끝까지 남은 700여 명의 의병만을 거느리고 금산성에 머물고 있는 일본군을 치기 위해 8월 16일 금산으로 진격했다. 당시 전라감사 권율(權慄)과 공주목사 허욱이 조헌의 무모한 진격을 말리면서 공격 기일을 늦출 것을 청했으나 조헌은 만류를 듣지 않고 단독으로 금산성으로 진격했다.

 또한 조헌은 영규에게 글을 보내 새벽에 금산성 협공을 제의하고, 휘하의 장병들에게 전투 준비를 시켰으나 비로 인해 공격 준비를 제대로 갖출 수 없었다. 이에 영규는 전투 준비 미흡을 이유로 만류했으나 조헌의 금산성 공격 의지가 매우 강하자 “조(趙)공으로 하여금 홀로 죽게 할 수 없다”고 하며 금산성 공격을 결정한다. 이후 영규는 조헌과 합세해 금산성 밖 10리까지 진출해 대치한 상태에서 관군의 후원을 기다렸으나 관군은 오지 않았다.

 한편 금산성의 일본군들은 조선 관군의 후원 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복병을 내어 퇴각로를 차단한 다음 연곤평(延崑坪) 일대에 진을 친 의병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결국 의병과 의승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장렬하게 싸웠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조헌 등 칠백의사는 전원이 순절했다. 이때 의승군들은 영규에게 후퇴를 권했으나 영규는 조헌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고 하며 끝까지 분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무기의 열세와 전술적 한계로 적의 파상공격으로 끝내 최후를 맞았다.

 이후 영규는 전투 중 심한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관군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고 공주 감영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상처가 심해져 1592년 8월 말께 공주 월암리(月岩里)에서 입적했다.

 영규는 승려들을 중심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봉기한 최초의 의승장으로서 이후 전국에서 승려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는 촉발제가 됐다. 그 공으로 의승장 중에서는 최초로 당상관이 됐고, 1597년 지중추부사에 추증되기도 했다. 당시 승려들을 업신여기고 불교를 배격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영규에 대한 융숭한 예우는 그의 높은 호국정신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박재광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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