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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의승군 정신적 지주 서산대사(西山大師)

기사입력 2012. 04. 30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7:55

“살상을 금하는 우리가 나서는 것은 부처님의 뜻”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은 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최세창(崔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다. 세 살 되던 해의 4월 초파일에 한 노인이 찾아와 “꼬마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며 두 손으로 어린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에 그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고 짓게 했다.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도 남다른 바가 있어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 하며 놀았다. 

서산대사 영정(전쟁기념관 소장)
승군을 지휘하는 서산대사.(전쟁기념관 소장)
서산대사를 모신 수충사.

 73세 때 의승군 모아 ‘爲國孝忠’ 기치 들고 일어나 평양성탈환전투 등 맹활약…명나라 장수들 극찬

 

9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에 의해 양육됐으며, 이때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이후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칠불동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깊이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가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한 뒤, 1540년에 계(戒)를 받았다. 그 뒤 운수(雲水) 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1552년 4월 12일에 승과(僧科)에 급제했고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됐다. 보우(普雨) 선사의 후임으로 봉은사 주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556년에 승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생각하고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돌아다니며 수행과 후학 지도에 전념했다. 1589년 정여립 사건에 연루됐다는 무고로 잠시 옥사를 겪기도 했다.

 1592년 조선 최대의 전란인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란하는 등 국가가 큰 위기에 닥쳤을 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서산대사를 불러 의논했다. 이에 73세 나이에도 불구하고 달려가 나라를 구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승려로서 국가적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서산대사는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해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했다.

 “여러분! 우리 불교에서는 살상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적이 여래의 가르침을 잊고 우리 중생을 살상하고 있으니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이 국토 안에서 살고 있는 이상 우리 모두가 국가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자!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워 조국을 구출합시다. 이는 곧 부처님의 뜻입니다.”

 위국효충(爲國孝忠)을 부르짖는 감동적인 명문의 격문에 의엄(義嚴)은 황해도에서, 금강산 표훈사에 있던 사명당(四溟堂)은 강원도에서, 처영(處英)은 전라도 지리산 등 전국 각지에서 승려들이 들고 일어나 구국에 앞장섰다.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해 권율 휘하에서 활동했고,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달려왔다. 서산대사 자신도 순안 법흥사에서 1500명의 의승군을 모아 직접 승군을 훈련·통솔했다. 이들은 의병 내지는 관군들과 협력해 많은 전과를 올림으로써 임진왜란 초기의 전세를 반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승려들 스스로가 봉기한 최초의 의승군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의승군은 자의로 봉기해 형성된 특수집단이지만, 신분이 승녀인 관계로 신분적·사회적 측면에서 의병과는 다른 처지에 있었다. 이들 의승군은 초기에는 의병들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활동체계를 유지하며 의병 내지는 관군들과 협력해 활동했으나 이후 도총섭을 중심으로 한 지휘체계를 갖추게 됐다.

 1592년 10월, 조정에서 서산대사를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 사명당을 부총섭에 임명해 도총섭이 전국 8도의 의승군을 총괄했고, 휘하에 총섭승이 각 도의 의승군을 통솔하는 체제를 갖췄다.

 이후 서산대사 휘하의 의승군들은 1593년 정월, 평양성탈환전투에 참가해 그 진가를 발휘했다. 당시 의승군 병력은 평양성탈환전투 참가 조선군 병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5000명에 달했다. 이들 의승군은 평양성에서도 가장 힘든 모란봉(牧丹峰) 지역을 집중 공략했다. 의승군들은 지역 지리에 밝았기 때문에 선두에서 모란봉 공격에 나서 다수의 일본군을 참획하는 등 활약을 펼쳐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후 조명연합군은 끝내 평양성을 탈환했고, 이로써 전세는 크게 변화됐다.

 한편 평양성탈환전투가 조명연합군에 의해 치러짐에 따라 명군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기도 하지만 조선군의 역할 또한 적지 않았다. 특히 의승군의 활약은 매우 컸다고 하겠다. 전투 이전에는 군량 보급과 일본군의 기동로 차단으로 일본군의 전투 준비를 어렵게 했고, 전투에 참가해서는 지형 파악에 유리함을 바탕으로 공격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다만 기록이 매우 소략하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의승군의 활약은 조선군을 얕보던 명 장수들에게서조차 찬사를 받았다. 명나라의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은 당시 서산대사에게 시첩을 보내 경의를 표하고 노고를 치하했는데, 그 말과 예우하는 뜻이 지극히 경건했다고 한다.

 이후 서산대사는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사명당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며, 열반을 준비했다. 이에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해 나라를 구한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했다. 이후 여러 곳을 순력하다가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친 후 입적했다. 이후 묘향산의 안심사, 금강산의 유점사에 부도가 세워졌고 해남의 표충사,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에 제향됐다.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 의승군의 정신적 지주로 서산대사의 충절은 이후 호국불교의 전통으로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온다고 하겠다.

 <박재광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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