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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평화의 외교승 사명당(四溟堂)

기사입력 2012. 04. 25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7:55

설법으로 敵 제압하고 당당한 외교로 ‘평화’ 찾아

임진왜란때 의병과 의승군은 전란을 극복하는 데 관군 못지않게 활약한 군사집단이라 하겠다. 특히 의승군은 의병에 비해 그 수는 적지만 전국 각지에서 들고일어나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런 의승군의 활약 뒤에는 명망 있는 의승장이 있었다. 팔도도총섭을 제수받은 서산대사[休靜]을 비롯해 사명당[惟政], 영규(靈圭), 의엄(義嚴), 처영(處英)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 의승장은 의병 또는 관군들과 협력하며 많은 전과를 올림으로써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사명당이 의승군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의승군 모집 전란 극복 투신 평양성 수복·노원평 전투 등 호국 의승장으로 전국 활약 해인사 부근서 무기도 제작 조선-日 通交 역할 큰 성과
설법으로 일본군 장수를 설득시킨 사명당.(전쟁기념관 소장)
사명당 영정(전쟁기념관 소장)
사명당 사명기(경남 밀양시 표충사 소장)

사명당(四溟堂 惟政 : 1544~1610)은 경남 밀양 무안면 고나리가 고향이다. 속성(俗姓)은 풍천임씨(豊川任氏)이며 속명(俗名)은 응규(應奎)다.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13세 때 당시 저명한 학자인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이후 세속적인 학문을 버리고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에 자비를 베푸는 글을 배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출가를 결심했다. 1558년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해 신묵(信默)의 제자가 됐고 3년 뒤 승과에 급제했다.

 그 후 선비들과 교류가 많았으며, 1573년(선조 6)을 전후해 직지사 주지가 됐다. 1575년 선종 봉은사 주지로 초청됐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서 서산대사 휴정 문하에서 수행했다. 그는 수행길에 올라 금강산·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 명산을 두루 돌았으며, 1586년(선조 19) 상동암(上東庵)에서 소나기에 진 낙화를 보고 무상을 느껴 문도들을 해산시키고 홀로 참선했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여름을 보내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후 고성의 건봉사에서 호국총궐기를 호소하는 도총섭 휴정의 격문을 보고 무려 800여 명의 의승군을 모았다. 이로써 관동지방의 적을 무찌르는 한편, 순안 법흥사로 가서 휴정의 주력 의승부대에 합류해 도대장이 됐으며 1593년(선조 26)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지키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해 의승군을 이끌고 관군을 도와 한성의 노원평과 우관동 일대에서 또한 크게 전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선교양종판사직을 제수했으며, 전공을 치하해 당상관에 오르도록 했다. 이후 1594년 명나라 총병 유정(劉綎)과 의논,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하며, 화의(和議)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 때에는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의 도산(島山)과 순천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동지중추부사가 됐다. 1604년에는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강화를 맺고 귀국하기도 했다. 이후 해인사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입적해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됐다.

 임진왜란 초기의 의승군은 의병과 같이 독자적인 지휘체계를 갖추고 각 지역에서 자발적이고 독자적인 형태로 활동했다. 이후 휴정이 도총섭으로 임명된 이후 의승군은 휴정을 중심으로 지휘체계를 갖췄다. 그러나 당시 휴정은 나이도 많고 기력이 쇠해 의승군을 실제 지휘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의승군 지휘는 사실상 사명당이 관장했다. 따라서 평양성수복전투 이전의 보급로 차단 및 정보활동, 그리고 평양성 수복전투, 이후 한성 수복의 계기가 되는 노원평전투 등은 사실상 사명당의 주도하에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한성 수복 이후 의승군의 역할은 관군의 재정비로 인해 그 기능이 변화하기에 이르러 도원수의 절제를 받게 되는 준관군의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따라서 의승군들은 군량 조달이나 운송, 성곽 수축, 관군 지원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사명당은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강화 회담을 가졌다. 그는 원군을 보낸 명나라와 일본군이 조선 영토를 완전 분할 점거하려는 책략을 미리 알고 능숙하게 기지를 발휘해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인질로 잡혀갔던 두 왕자의 신병 반환에도 성공했다. 적진 깊숙이에서 벌어진 협상 기간 중에는 적의 형세를 잘 관찰해 탐정하는 역할도 잊지 않았다. 당시 일본 장수 가토가 “귀국에는 진귀한 보물이 많다는데 어떤 것이 가장 값진 보물인가”라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목을 벤 사람에게 천근의 금을 하사하고 1만 호나 되는 고을을 봉해 주겠다고 현상했으니 그것이 보배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회담 이후에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賊情)을 알리는 상소를 올려 토적보민(討賊保民)을 이루고,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국방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팔공산성, 금오산성, 용기산성, 악견산성, 이숭산성, 부산성 및 남한산성 등의 산성을 수축했다. 또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에서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일본군 조총병을 활용해 화약 제조 및 조총 사용법을 익히도록 했다. 또한, 산성 주위를 개간해 군량미 4000여 석을 비축하기도 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조선왕조는 두 번 다시 왜적이 침입하지 않도록 일본과의 화평을 강구하고 나섰다. 1604년, 사명당은 어명을 받고 강화사절로서 문하의 몇몇 승려와 당시 절충장군 손문욱과 함께 대마도를 거쳐 교토(京都)로 갔다. 그는 일본에 체류한 8개월 동안 각종 외교적 노력을 계속해 성공적인 성과를 거뒀다. 특히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회견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이 옛날과 같이 평화롭게 통교(通交)할 것을 약속하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우리 백성을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한 것은 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 후기의 약 300년에 걸친 기간 동안 일본과 평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명당의 힘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전쟁기의 수많은 전투나 일본과의 외교전에서 보여준 용맹스럽고 당당한 사명당의 모습은 후세에 귀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박재광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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