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임진왜란의병영웅열전

<7>영천성 탈환전투 수장 권응수(權應銖)

입력 2012. 04. 24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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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지상전 첫 승리’ 이끈 잊혀진 영웅


권응수(權應銖 : 1546~1608)는 영천에서 출생한 후 1583년 무과에 급제해 무인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훈련원 부봉사로서 북방 변경 수호 임무를 맡은 뒤 1591년 경상좌수사 박홍의 참모로 활동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적을 섬멸하기 위해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가 의병을 모집해 궐기했으며 대동전투, 한천전투 등 크고 작은 싸움에서 승리를 끌어냈고 7월 27일에는 영천성을 탈환했다. 권응수는 경주성을 되찾은 것을 계기로 다시 관군에 복귀해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 경상좌도 병마우후를 거쳐 병마조방장이 됐다.


경주성 탈환 등 17차례 전투 치르며 전공 세워 영천성 전투서 무기 노획·조선인 1090명 구출
임진왜란 선무공신들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회맹의식을 그린 태평회맹도 병풍.(진주박물관 소장)
선조 임금이 하사한 권응수 선무공신 영정.

권응수 유물.(진주박물관 소장)

이후에도 울산전투와 밀양성전투, 황룡사전투, 달성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워 경상도 방어사, 충청도 방어사, 영변부사, 황해도·평안도 병마수군절도사, 한성부좌윤, 공조판서를 두루 지냈다. 그러나 전란이 막바지로 치닫던 1599년 6월 무고를 당해 투옥되기도 했다.

 임란 종전 후 1604년에 권응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선무공신 2등에 봉해진다. 1등 이순신·권율·원균, 2등 신점에 이은 서열 다섯 번째였다. 이후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임했다. 1608년 7월 한양에서 63세로 서거한 이후 1693년에는 충의공(忠毅公) 시호가 추증됐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진성이 무너지고 15일에 동래성마저 함락되자 권응수가 복무하던 경상좌수영도 크게 동요했다.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망간 상태에서 권응수는 잔여병력을 이끌고 저항의 방도를 찾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에 권응수는 적이 휩쓸고 지나간 좌수영의 뒷수습을 끝낸 후 “한 무사로서 나라를 위해 이 자리에서 의롭게 죽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긴 하지만, 잠시의 치욕을 무릅쓰고 뒷날을 도모해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 더 값진 일이 될 것이다. 앞으로 어떠한 싸움에서도 앞장서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소규모 전투로 의병의 자신감 높여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4월 27일, 의병을 일으킨다. 그리고 5월 6일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창의지역 근처인 대동과 한천에서 두 차례의 첫 전투를 치른다. 이 전투에서 각각 적병 몇 명씩을 죽이고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몇 명의 남녀와 마소 몇 마리씩을 빼앗아 돌아온다.

이 전투는 비록 소규모였으나 그 결과로 인근의 주민과 의병들에게 ‘이렇게 싸우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후 인근 고을의 의병들이 많이 합류함으로써 의병활동이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권응수는 “삼로(三路)의 요충인 영천성의 왜적을 빨리 소탕하지 않으면 적의 세력이 더욱 강화돼 영좌(嶺左)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더 큰 위험에 빠지고 백성이 더 많은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루빨리 영천성을 수복하자”고 선포했다. 이를 시작으로 권응수는 영천성과 경주성 탈환 등 17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가장 대표적인 전과인 영천성 탈환전투는 오늘날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당시 실록에 “영좌를 수복한 공로는 이순신의 공과 다름이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매우 높게 평가를 받은 전투다.

왜냐하면 이 전투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성곽을 공격해 점령한 최초의 전투였기 때문이다.

당시 경상우도에서 활동했던 김면이나 경상좌도·우도의 경계지점에서 활약한 곽재우도 영천성 수복 이전에 몇 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으나 전투 규모면에서 영천성 탈환전투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임진왜란 연구자들은 이 전투를 “임진왜란 지상전 최초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영천성 탈환전투는 1592년 7월 24일부터 진행됐다. 당시 경상좌도의 의병들은 일본군이 점령한 영천성 탈환을 위해 영천읍성 남쪽 벌판에 모여들었다.

권응수는 ‘창의정용군’이라 칭하고, 총대장 권응수, 전봉장 홍천뢰, 중총 정대임, 좌총 신해, 우총최문병, 별장 김윤국으로 총병력은 3970명에 달했다. 당시 영천성에는 일본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병력 약 1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체 전황은 조선 관군의 연패로 조선군이 불리했지만 의병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7월 25일, 권응수의 의병부대는 하루 종일 공격했으나 극렬한 일본군의 저항에 부딪쳤다. 당시 일본군은 병력 규모는 작았으나 조총 등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전투력은 의병들보다 월등했다. 7월 26일, 의병 500명이 성 밑으로 접근하자 일본군은 성 밖으로 나와 공세적으로 압박을 가했으나 의병들이 굴하지 않고 백병전 벌이자 일본군은 성안으로 후퇴했다.

임란 의병, 일제 독립투쟁 뿌리 돼

 이후 27일, 마현산 기슭에 쌓아 놓은 나뭇더미에 불을 질러 적의 시야를 차단한 뒤 사다리를 이용해 등성작전에 돌입했다. 이에 적이 성안 건물에 의지해 저항을 계속하자 의병들은 화약과 질려포 등을 이용해 화공전으로 응수했다. 그 결과 불길이 성안으로 번지고 창고와 화약고에 불이 붙어 폭발해 화염이 치솟자 당황한 일본군들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의병들은 달아나는 일본군들을 집중 공격해 일본군 수급 517두를 베고, 군마 200여 필, 조총과 창검등 무기 900여 점을 노획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조선인 1090명을 구출하는 대 전과를 거뒀다. 이후 이 일대 일본군은 상주로 퇴각하기에 이르렀다.

 권응수는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장수 중 이순신 다음으로 풍부한 유물을 남기고 있다. 사용했던 장검을 비롯해 국왕 선조의 교지와 유서 등이 남아 있으며 공신 책봉과 관련된 선무공신교서, 태평회맹도 병풍, 선무공신 영정 등이 남아 있다. 이들 유물은 보물 668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영남지방에서 시작된 임란 의병은 바로 훗날 구한말 의병과 일제 독립투쟁의 뿌리가 됐다. 나라 위해 신명을 바치는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영남 선비정신이 의병정신으로 승화됐던 것이다.

 <박재광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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