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기후와역사전쟁과기상

<163>왜구 토벌과 세종

입력 2012. 04. 23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7:54
0 댓글

대마도 상륙 조선 수군 ‘대마’ 잡았다


“가뭄으로 인한 굶주림과 병의 만연으로 인해 잇달아 쓰러진 사람의 층이 길을 덮었다.”(고려사) 고려 말은 세계적인 소빙하기(little ice age)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공민왕 21년(서기 1372년)에는 겨울에 눈이 없어 극심한 가뭄이 들면서 산이 무너지고 우물과 샘이 모두 말랐으며 포(布) 한 필 값이 쌀 1두 5승이었다고 한다. 공양왕 시대에도 여름 서리, 냉하(夏) 등으로 기온이 낮았으며 기상재해가 빈번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추위와 가뭄으로 경제사정이 매우 어려워지면서 이들은 떼를 지어 고려와 원나라를 습격해 식량을 탈취해 갔다.


여몽연합군도 태풍으로 두 번이나 패배 열흘간 전투 70년 지속된 골칫거리 없애
바로 이들이 왜구들로서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대규모의 병력으로 해안 지역을 습격해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너무나 잔인하고 포악한 왜구의 만행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고려는 온 국력을 기울여 왜구를 소탕하는 작전을 펼쳤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토벌사령관으로 임명해 남원 인근에 있는 황산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가뭄과 추위로 식량이 부족해진 왜구는 끈질기게 우리나라와 중국에 대한 약탈을 계속했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치기로 한다. 당시 원정함대 총사령관은 이종무 장군, 좌군도절제사는 유습 장군, 우군도절제사는 이지실 장군이었다. 대마도 정벌 전함은 227척에 군사는 1만7285명이었다. 식량은 모두 65일분을 준비했다. 장기간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한 것이다.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기 전 사전 정지 작업을 했다. 첫째, 조선은 부산포와 내이포의 왜관을 폐쇄했다. 왜인들과 왜구의 연락을 두절시켜 정보 유출을 차단한 것이다. 둘째, 난폭한 왜인들은 아예 처형해 버렸다. 말썽을 일으킬 여지를 없앤 것이다. 셋째, 명분을 쌓았다. 대마도 도주에게 조선에서 약탈을 자행한 해적들을 체포해서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군대를 일으킬 명분을 만든 것이다. 넷째, 정벌 중 국내방어 대책을 수립했다. 장정들을 총동원해 국내의 군사적 요충지를 충분히 지키도록 했다. 준비를 마친 후 드디어 출정의 깃발을 올렸다.

 견내량을 출발한 조선 수군은 해류를 타고 단 하루 만에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에 도착한다. 대마도는 97%가 산으로 이뤄진 척박한 땅으로 매우 복잡한 해안선과 뱃길을 갖고 있다. 조선 정벌군은 대마도 아소만의 오자끼 지역에 상륙했다. 이종무 장군은 대마도주 종정성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대마도주가 듣지 않자 원정대는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상륙과 동시에 조선군은 왜구를 격파해 적선 129척 소각, 왜구 120여 명 사살, 가옥 2000여 채를 불태운 후 왜구에 잡혀 있던 중국인 포로 131명도 구출한다. 왜구들은 섬 깊숙이 숨어들어가 저항을 계속했다. 1차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기 때문이었을까? 조선군은 니로군 지역에 상륙해 2차 공격을 하다 큰 피해를 입는다. 지형에 어두웠던 조선 수군은 왜구의 매복에 걸려 180여 명이 전사하는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한 것이다. 전함으로 후퇴한 조선군은 향후 대책에 대해 군사회의를 열었다. 애당초 65일분의 식량을 준비한 것은 장기전을 준비하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날 회의에서 돌연 철군을 결정한다. 대마도에 도착한 지 고작 열흘 만에 철군을 하겠다는 것이다. 철저한 준비와 최정예 부대 투입, 전투의 승리로 교두보 확보에 성공한 정벌전, 그런데도 이종무의 조선 정벌군은 이 모든 유리한 조건을 버리고 철군을 결정한 것이다. 비록 한 번의 패배가 있었다 해도 아직 전력의 대부분은 유지되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종무 장군은 철군한 이유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역사가들이 추론해 본 것으로는 첫째, 예상보다 대마도 왜구들의 저항이 강했다. 둘째, 일본 본토의 규슈 등에서 지원병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셋째, 대마도주와의 비밀협약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만일 항복하고 조선의 명을 따른다면 그에 따른 보상을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실제 정벌전 이후 대마도의 왜구들은 조선의 정치질서 속으로 편입됐다. 대마도주에게 조선의 국왕이 관직을 내려주고 공식적인 무역을 허락했으니 말이다. 서로의 실리를 챙긴 윈-윈의 예인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으로는 태풍에 대한 공포였다고 전해진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때 두 번이나 태풍으로 패배를 당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함 안에 있던 여몽연합군이 태풍으로 전멸했었다. 정벌전 기간은 계절적으로 태풍의 내습시기였다. ‘정벌군은 태풍을 우려해 조선으로 귀환했다’ ‘선상에서 장기간 해상 작전에 대비한 태풍 등 기상 정보를 수집할 필요성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고작 열흘 간의 전투에 불과했지만 세종의 대마도 정벌전쟁은 고려 말부터 계속된 70년 왜구 문제에 종지부를 찍은 쾌거였다.


 [Tip] 뛰어난 리더 세종-군사력 축적 압록·두만강까지 영토 넓혀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발돋움했던 시기가 고구려 이후 조선조의 세종 때다. 세종대왕은 우리의 영역을 현재 영토인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는 지역까지 넓혔다. 다소 무리하게 강제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써서 영토로 편입할 정도로 북방 영토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왕이다. 또 고려 때부터 골머리를 앓아오던 왜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국정의 안정을 이뤘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무려 500차례 이상 왜구의 침략을 받게 되자 조선의 세종대왕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결심한다. “조선 최대의 원정함대, 대마도를 정벌하라!” 세종의 대마도 정벌은 해외파병의 명분과 국익을 동시에 추구했던 매우 좋은 사례다. 독자적 판단으로 공세적인 대규모 군사행동을 통해 왜구의 위협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축적된 군사력의 수준과 역량을 입증했다. 남쪽의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국가적 역량을 북방의 경비 강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삼포(三浦 : 지금의 부산ㆍ울산ㆍ진해항)를 개항해 일본과의 무역을 활성화하고, 동북아 해상 안전을 확보했다. 명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한 뛰어난 리더로 국민은 행복해졌고, 나라는 강성해진 것이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