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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치욕의 병자호란

기사입력 2012. 02. 27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7:43

조선軍 ‘질색’ 맹추위+폭설 靑나라 ‘화색’ 靑 군사 추위에도 놀라운 전투력 인조, 강화도 함락되자 바로 항복

내몽고를 통일한 후금의 태종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면서 자신을 황제로 칭한다. 그는 1636년 사신 용골대를 조선에 보내 군신관계를 맺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다. 국제정세에도 무지했고 명에 대한 사대사상에 사로잡혔던 조선의 인조는 용골대를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용골대는 서울을 떠나면서 객사의 벽 위에 청(靑)자 한 글자를 써 놓고 갔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청(靑)자는 십(十)+이월(二月)이 되며 이것은 12월 압록강에 얼음이 얼 때 조선을 쳐들어올 것이라고 예고한 것이며, 전쟁 시기를 자기들에게 가장 유리한 날씨조건에 맞춘 것이라고 말한다. 내몽고를 통일한 후금의 병력은 아시아에서 가장 추위에 적응이 잘된 군사들이었기에 이런 해석이 나왔을 것이다.

        남한산성의 모습.                                                  김상헌을 기리는 시비.

 조선의 왕이 자기의 사신을 만나주지도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격노한 청태종은 1637년 1월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다. 본래 이들은 만주 북부와 몽고 지방에 살던 기마 민족으로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과 살을 에는 강한 바람에서 단련된 민족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용골대가 예고한 것처럼 가장 추운 1월에 침공을 단행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실력을 우습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혹 그들이 쳐들어오더라도 명나라가 구원해 줄 것이며, 또 조선의 가장 유능한 맹장인 임경업 장군이 백마산성을 지키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이런 생각을 비웃듯 청나라의 선봉대는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피해 서울로 직행한다. 그들은 마치 날아가는 화살처럼 9일에는 압록강을 14일에는 개성을 통과했다. 그런데 정작 조선의 조정이 청나라의 침입을 알았던 날은 13일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놀란 조정에서는 왕자와 비빈, 그리고 남녀 귀족들을 급히 강화도로 피란시키고 난 후 인조도 뒤따라 강화도로 가려 했으나,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은 막혀 있었다. 겨우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있었던 인조는 그곳에서 8도에 근왕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보내고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왕을 구하고자 도처에서 일어난 구원군들은 청군에 의해 격파돼 버리고 만다. 이제 성 안에 있는 1만3000명의 병력은 18배의 병력에 달하는 청나라에 포위돼 버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해 정월에 수 척이나 쌓이는 큰 눈과 맹추위가 있어 모든 강이 다 얼어붙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이 정도의 눈이 내리면 모든 교통이 마비될 정도의 큰 눈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장비와 무기, 그리고 갑옷이 없었던 조선의 근왕병들은 청나라 군사에 아예 상대가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포위된 지 45일이 지나자 식량은 떨어졌고, 유달리 눈이 많고 추웠던 그 해 겨울이 기승을 부렸다.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매일 수백 명씩 죽어나갔다. 성 안에서는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파와 항복하고 미래를 바라보자는 주화파가 대립했다.

 척화파인 김상헌이 말한다. “적이 비록 성을 에워쌌다 하나 아직도 고을마다 백성들이 살아 있고, 또 의지할 만한 성벽이 있으며, 전하의 군병들이 죽기로 성첩을 지키고 있으니 어찌 회복할 길이 없겠습니까? 죽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주화파인 최명길이 답한다. “전하,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적의 아가리 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것이옵니다. 이제 적들이 성벽을 넘어 들어오면 세상은 기약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이들 사이에서 더 싸워야 할지 항복해야 할지 결단하지 못하던 인조는 강화도까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항복을 결정한다. 1637년 정월 30일 인조는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에 나아가 수항단(受降壇)에서 청태종을 향해 치욕스러운 삼궤구고두(세 번 절을 하는데 절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세 번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의식)의 항복을 하게 된다.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부녀자들이 욕을 당했으며 또 고아들이 가장 많이 나온 것이 병자호란이다. 민간인이 가장 큰 피해를 당하고 수십만 명이 포로로 잡혀간 치욕적인 기록을 갖고 있는 전쟁이기도 하다. 청나라가 외국과의 전쟁에서 가장 적은 희생으로 가장 큰 승리를 거둔 것이 병자호란이기도 했다.

 이들이 이렇게 쾌승하게 된 배경은 남쪽지방의 명나라가 겨울에는 조선을 돕기 위해 출병하기 어렵다는 것, 모든 강이 얼어붙어 공격하기가 쉽다는 점, 청나라 병사들이 다른 나라의 군사와 달리 추위에 가장 적응을 잘하며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한다는 점이었다. 철저하게 날씨를 전쟁에 이용한 청나라의 전략이 돋보이는 전쟁이 병자호란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해 겨울이 별로 춥지 않아 강이 얼지 않았거나 눈이 덜 내려 근왕병들이 더 많이 전투에 참여했거나, 명나라의 구원병이 참전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Tip]치욕을 기억하라-무능한 지도자 무고한 백성들 희생 불러

몇 년 전 서점가에 때 아닌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열풍이 불었다. 많은 독자가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636년 겨울, 47일간 갇힌 성 안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낱낱의 기록.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 줄 것이라는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많은 조연들의 모습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지혜가 없는 자는 그 미련함으로 망한다고 잠언은 말한다. 싸울 힘도, 능력도, 정보력도 없는 상태에서 싸우겠다고 큰 소리치는 것은 미련한 짓이 아닐까? 소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바로 ‘치욕을 기억하라(memento infamia)’가 아닐까? 다시는 무능한 지도자들로 인해 무고한 백성들이 수치와 치욕과 죽음을 당하지 않는 나라가 돼야만 한다. 지도자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백성을 섬기게 해 달라는 워싱턴의 기도가 새삼 생각나는 오늘이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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