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다시쓰는6·25전쟁

<77·끝>전쟁이 남긴 것

김병륜

입력 2011. 12. 26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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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지켜낸 것' 큰 의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측 휴전회담 수석대표 윌리엄 헤리슨 미 육군 중장과 공산 측 대표인 북한군 남일(南日) 대장이 판문점 회의장에 입장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의 만남에는 악수도 없었고, 목례도 없었다.

 양측 대표는 웃음기 하나 없는 사무적인 표정으로 탁자 위에 놓인 정전협정과 그외 부속 문서 등 총 18통의 문서에 서명을 계속했다. 서명에 걸린 시간은 단 ‘11분’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비극적 전쟁은 3년 1개월 만에 그렇게 끝났다.

6·25전쟁을 전면 휴전으로 사실상 끝내는 내용을 담은 정전협정 문서. 이 협정의 체결로 3년 1개월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왼쪽). 정전협정 부속 문서 중 하나인 지도책의 표지. 자료사진

◆ 정전협정의 체결

 이날 양측 대표가 서명한 정전협정의 핵심은 양쪽 군대가 장악한 지역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정하고 1953년 7월 27일 밤 10시를 기해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한다는 것이었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각 2㎞까지는 일종의 완충지대인 비무장지대로 정했다.

 6ㆍ25전쟁을 마무리한 문서의 명칭은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Korean Armistice Agreement)’이다. 전쟁을 사실상 종결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일반전으로 휴전에는 전면 휴전(General Armistice), 부분 휴전(partial of local armistice), 정전(Truce) 혹은 전투 중지(suspensions of arms) 등 세 종류가 있다. 원래 전면 휴전은 전 군대와 전선에 걸쳐 적대행위를 중지하는 것이고, 부분 휴전은 특정 부대나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적용하는 휴전이다. 이에 비해 정전은 부상자의 후송 혹은 사망자 시신 수습 등의 목적으로 잠정적ㆍ일시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 휴전 vs 정전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은 ‘정전’이란 용어를 썼지만 영문 명칭은 휴전을 의미하는 ‘Armistice’란 용어를 선택했다. 내용으로 볼 때도 사실상 전면 휴전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지금도 휴전과 정전이란 용어를 혼용한다.

 1950년대 이후 고전적 의미의 정전과는 개념이 다르게 유엔이 개입한 좀 더 포괄적인 성격의 휴전도 정전(Truce)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개념이 약간 바뀐 탓에 오늘날에는 휴전과 정전을 의미 구별 없이 쓰는 경우도 있다.  

 전쟁을 사실상 마무리하는 방법에는 휴전 외에도 정복이나 항복 조인식 등이 있다. 하지만 6·25전쟁은 승패를 정하지 못하고 끝난 탓에 사실상 휴전이 선택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휴전이나 항복 조인식으로 사실상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지만 국제법적으로 좀 더 분명히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강화조약(treaty of peace) 혹은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도 있다. 일본과 연합국들은 1945년 태평양 전쟁을 사실상 끝냈지만 샌브란시스코 강화조약을 1951년 9월 8일 조인했다.

 이와 달리 6·25전쟁은 강화조약 없이 전면 휴전을 의미하는 정전협정으로 사실상 전쟁이 끝났다. 대신 정전협정 제60항은 협정체결 3개월 이내에 정치회담을 열어 여러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정치회담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54년 7월 21일 종결됐다.

◆ 한국이 빠진 이유

 6·25전쟁 정전협정 문서의 정식 명칭은 무척 길다. ‘국제연합군(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협정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측 대표는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우리 정부 스스로가 협정에 직접 서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을 막대한 인명ㆍ재산 손실만 남긴 채 그냥 끝내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든 불법 남침으로 민족적 참화를 불러온 북한 정권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이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어떤 식으로든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대통령은 전쟁을 정전협정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면, 대신 미국의 안전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정전협적 성립 후 한미 양국 간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추진하겠다고 1953년 7월 12일 약속했다. 국군 20개 사단 창설을 지원한다거나 유사시 미국이 한국 방위를 돕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이 대통령의 거시적 안목 덕에 전후 안전보장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미국 측의 이 같은 제안에 따라 이 대통령은 유엔군 총사령관 명의의 정전협정 체결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정전협정을 준수할 의사가 있었고, 협정의 법적 효력도 인정했으며, 서명 여부에 상관없이 정전협정의 당사자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별도의 한국군 대표가 협정에 직접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불법 남침으로 전쟁을 시작한 북한 정권의 책임을 지적한 것이다. 

◆ 전쟁의 의미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6ㆍ25 전쟁은 민족적 비극이었다. 남북을 합쳐 수백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김일성을 수뇌부로 하는 당시 북한 정권에 비극적 전쟁을 시작한 근본적 책임이 있다.

 하지만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북한 정권은 남침 사실을 부인하면서 대한민국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는 거짓 주장으로 일관했다. 1990년대부터 구소련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민족적 대참화의 원인이 된 전쟁을 일으키고도 60년 넘게 남침 사실을 부인하는 북한의 행태는 남북 화해를 가로막는 불신의 근원이 되고 있다. 그런 행태는 천안함 피격 사건에서도 반복됐다. 그렇기 때문에 안보 전문가들은 “북한 정권이 6·25 남침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남북 상호 신뢰를 회복하는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또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6·25전쟁은 비극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역사였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 비극이라면, 대한민국을 지켜낸 것은 위대한 일이었다.

 6·25전쟁 때 13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분투했던 국군과 5만여 명의 값진 희생을 치른 미군과 기타 유엔군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전쟁이라는 일대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적의 기습으로 국가존망이라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섰던 대한민국이 그렇게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것은 오늘날 발전과 번영의 출발점이었다. 



■ 전쟁 피해는 얼마나? - 국군 전사·사망 13만7899명
 
 6·25전쟁에 따른 인명 피해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전사상자 통계도 약간씩 차이가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신인 국방군사연구소가 1996년 펴낸 ‘한국전쟁 피해통계집’에 따르면 전쟁에 따른 우리 군 전사ㆍ사망자의 총수는 13만7899명이다. 여기에 1만9392명의 실종자가 별도로 있었다. 같은 자료를 기준으로 미군 전사ㆍ사망자의 총수는 5만4246명이었다.  

 북한군의 전사, 사망자 수에 대해 국방부의 ‘한국전란 4년지’는 50만8798명으로 추산한다. ‘군사정전위 편람’은 52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공군 전사·사망자에 대해 홍콩 언론은 14만8600명이라고 보도한 사례가 있다. 중국 스스로는 ‘항미원조전사’라는 공식 간행물을 통해 전사, 부상 구분 없이 인명 피해가 모두 39만5815명이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공보처가 1953년 발표한 공식 자료에 따르면 한국 측 민간인 피해는 사망·납치·부상·행불자를 포함해 99만968명이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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