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군세계를가다

<45> 라이베리아·코트디부아르 파병

입력 2011. 11. 29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7:25
0 댓글

전쟁 `마침표' 찍고 무장세력간 분쟁 무정부상태 진통 평화 `진행형' 쓰다


아프리카 중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라이베리아와 인접국 코트디부아르는 자국 내의 무장세력 간에 발생한 분쟁으로 무정부 상태를 겪었다. 그로 인해 두 나라에는 각각 유엔임무단이 파병돼 활동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유엔의 요청을 받아 두 나라에 각각 2명의 장교를 파병하고 있다.

미국대사와 함께 라이베리아 분쟁지역을 순시 중인 서리프 라
이베리아(오른쪽) 대통령.

 

유엔코트디부아르임무단 본부를 찾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관계자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1 라이베리아 파병

 ▲ 분쟁 개요

 라이베리아는 1821년 미국식민협회가 해방노예들을 이주시켜 건설한 나라다. 당시 미국은 노예해방과 관련된 남북전쟁(1861~1865)이 발생하기 전이었지만 노예문제가 점차 국가적 과제로 대두되면서 “흑인노예들을 아프리카로 다시 되돌려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그 시기인 1817년 창설된 미국식민협회는 일부 주 정부와 교회의 지원을 받아 노예들을 사들여 1867년까지 6000여 명의 노예들을 아프리카로 이주시켰다.

 이주 노예들은 1847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국가를 수립해 ‘Liberia’ 즉 ‘자유의 나라’라고 명명했다. 성조기를 모방해 국기를 만들고 미국식 헌법도 제정했다. 그곳에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한 해방노예들이 130여 년 동안 정권과 고위직을 독점했다. 소수집단의 권력독점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결국 1980년 원주민 출신 육군상사 사무엘 도우(Samuel Doe)가 주도하는 부사관 17명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로써 해방노예의 권력독점시대는 막을 내렸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하기도 했던 도우 역시 부패를 자행하면서 민심을 잃었다. 그로 인해 1990년 테일러가 주도하는 무장세력에 의해 도우가 피살되면서 원주민 간의 무장투쟁이 발생했다. 그 후 1993년 9월, 유엔의 정전감시단(UNOMIL)이 창설돼 유엔에 의한 감시가 시작됐다. 그러나 내전은 계속됐으며 유엔 요원까지 습격을 받는 등 25만여 명이 사망하고 100만여 명의 피란민이 발생했다.

 유엔은 2003년 9월, ‘유엔 라이베리아임무단(UNMIL)’을 창설하고 1만5000여 명의 평화유지군을 파병해 사태를 진정시켰다. 이어 2005년에는 선거에 의해 서리프(E. J. Sirleaf)가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점차 평화를 정착시켜 나가고 있다.

▲ 한국군 파병과 역할

 정부는 2003년 11월 유엔의 요청에 따라 평화유지군사령부 정보참모로 채광희 육군중령, 옵서버로 김진태 육군소령 등 2명의 장교를 라이베리아에 파병했다. 파병된 장교들은 통상 1년 단위로 교대하고 있으며, 육군 또는 공군에서 2명의 영관장교가 계속 파병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라이베리아의 평화구축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자 유엔은 지난해 5월, 평화유지군 규모를 8000명 수준으로 축소했다. 그 후에도 유엔군의 감축은 계속되고 있지만 한국군이 포함된 정전감시단의 임무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2 코트디부아르 파병

 ▲ 분쟁 개요

 라이베리아 동쪽의 코트디부아르는 1800년께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왔으나 1893년 자치령이 됐다. 그리고 1960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면서 의사 출신의 우푸에 부아니(Houphouet Boigny)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반대파를 정부조직으로 흡수해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친 프랑스 정책과 카카오 위주의 농업정책으로 연간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2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달성하는 영도력을 발휘했다. 그 같은 성과에 힘입어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 경제성장의 모범국가가 됐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면서 세계적인 경제불황, 가뭄, 농산품 가격하락 등으로 경제위기가 초래됐다.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고향인 내륙의 ‘야무수크로’에 행정수도를 건설하고 천도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경제는 더욱 악화됐다. 종족 간의 갈등도 고조되기 시작했다. 1990년 다당제를 도입하는 등의 정치 민주화 이후에도 부아니 대통령은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됐으나 1993년 88세로 사망하면서 정국은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됐다.

 국민의 신망을 받던 인물은 북부 출신의 와타라였다. 1990년 IMF에서 경제전문가로 근무하고 있던 와타라를 총리로 영입한 사람은 부아니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부아니 사망 이후 1995년의 대선에서 당선된 베디에 대통령은 정적인 와타라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국적을 문제 삼아 선거출마 자격을 박탈했다. 그러나 그의 조치는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으며, 경제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1999년 12월에는 게이 장군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2000년 10월, 군사정부의 민정 이양 조치로 선거가 실시됐으나 출마자격을 제한해 와타라와 베디에는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선거결과 로랑 바그보(Laurant Gbagbo)가 당선되자 게이 장군이 불복하면서 내전이 발생했다. 이어 2002년 9월에는 바그보 대통령이 북부 출신 군인들을 대량 해고하면서 북부에서 반군의 쿠데타가 발생해 내전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2004년 4월, 유엔은 코트디부아르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프랑스군 4000여 명 등 1만여 명을 파병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주둔을 반대하는 바그보 대통령 측의 시위와 외국인에 대한 공격으로 프랑스 군과 민간인 8000여 명이 철수했다. 그때 우리나라의 교민 30여 명도 함께 철수했다. 그 후 2005년 4월 남아공 음베키 대통령의 주선으로 정부·반군·야당 대표가 회동, 와타라의 대선출마를 허용하고 무장을 해제한 후 대통령 선거를 갖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바그보 측의 방해공작으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분쟁은 계속됐다.

 마침내 지난해 10월과 11월, 1차 투표 및 결선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와타라 54%, 바그보 46%로 와타라의 승리였다. 그러나 바그보의 측근으로 구성된 헌법위원회는 북부지역의 선거구를 무효화하고 바그보의 당선(51%)을 선포했다. 이에 양측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하면서 내전은 더욱 격화됐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는 와타라 측이 대통령 관저로 진입해 바그보와 측근들을 체포하면서 오랜 내전은 종식됐다.

 지난 5월 21일 와타라 대통령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아프리카 정상 등이 참석한 가운데 취임식을 갖고 통합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 한국군 파병과 역할

 2009년 11월 정부는 유엔의 요청에 따라 이호준 공군중령과, 문한옥 육군소령을 코트디부아르에 파병했다. 그들은 현지에서 옵서버로 선거·정전감시요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도 그들의 후임으로 2명의 영관장교가 이어받아 계속 근무하고 있다.

 그에 앞서 반기문 사무총장은 2007년 10월, 혼미를 거듭하고 있던 코트디부아르에 평화를 정착시킬 책임자로 최영진 주 유엔대사를 임명했다. 그해 11월, 현지에 부임한 그는 바그보 측을 압박해 선거를 치르도록 하고, 바그보 측의 선거부정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면서 와타라의 당선을 선포했다. 따라서 그는 코트디부아르 신정부 출범의 주역으로 세계의 언론과 관계자들로부터 주목과 찬사를 받고 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 연구부장>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