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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사이프러스 파병과 서부사하라 선거감시단 파병

입력 2011. 11. 22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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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중재 명지휘 세계가 서프라이즈!


지중해에서 시칠리아, 사르데냐에 이어 3번째로 큰 섬 사이프러스(키프러스)는 그리스계 주민과 터키계 주민 사이의 분쟁으로 1974년 이후 남·북 분단 상태에 있다. 2002년 1월, 황진하 중장이 단신으로 그곳에 파병되어 2년 동안 평화유지군 사령관을 역임하며 평화를 중재했다.

  한편 아프리카 서북단에 위치한 서부사하라는 1994년부터 2006년까지 12년 동안 한국군의료지원단이 파병돼 지원했던 곳이다. 그곳에는 의료지원단과 별도로 선거지원단 요원으로 2009년 7월부터 현재까지 2명의 장교가 파병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사이프러스 파병
황진하 사이프러스 유엔 평화유지군 사령관이 분쟁 현장을 방문한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 부처를 안내하고 있다.
▲ 분쟁 개요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아프로디테(비너스) 여신이 탄생한 곳으로 전해지는 사이프러스 섬은 해상교통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어 역사적으로 많은 수난을 겪었다. 근대에 들어와 1570년부터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사이프러스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 병합되었다. 그 시절 영국은 사이프러스를 왕실직할령 식민지로 개발했다. 그 덕분에 사이프러스는 요즈음에도 연간 20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매력적인 섬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사이프러스의 독립운동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영국은 1980년 8월, 그리스·터키와 ‘런던협정’을 채결해 사이프러스의 독립을 결정했다. 현재의 사이프러스 인구는 114만여 명으로 그리스계 76% 터키계 24%이지만 당시에는 8 : 2의 비율이었다.

 런던협정에서 3국은 사이프러스의 권력을 분점해 그리스계가 대통령과 내각·의회의 70%를, 터키계는 부통령과 내각·의회의 30%를 각각 점유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60년 10월 1일부로 사이프러스공화국(Republic of Cyprus)이 출범했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를 믿는 그리스계와 이슬람을 신봉하는 터키계가 대립하면서 정국은 안정되지 못했다.

 그 사이에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63년 당시 마카리오스 대통령이 그리스와 병합을 목적으로 권력공유형태의 헌법을 개정하면서 양측 주민 간의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유엔은 1964년 양측의 중재를 위해 영국이 주도하고, 세계 각국에서 지원하는 1300여 명의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다. 그러나 1974년 7월 그리스와 병합을 주장하는 친 그리스계 군부쿠데타가 발생하자 터키가 군대를 파병해 전쟁상태에 돌입했다. 터키는 터키계 주민보호 및 사이프러스 독립보장이라는 명분으로 사이프러스 북부, 영토의 37%를 점령했다. 이어 터키는 점령지역 내의 그리스계 주민 20만여 명을 추방하고 남쪽지역 8만5000여 명의 터키계 주민을 이주시켰다.

 그 후 1980년 11월, 터키의 주도로 북사이프러스의 독립이 선포됐다. 이에 대해 유엔은 사이프러스(남측)가 유일한 독립국이므로 북사이프러스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도록 회원국에 통보했다. 따라서 현재까지 북사이프러스를 승인한 국가는 터키가 유일하며 지금도 3만여 명의 터키군이 주둔하고 있다.

 2002년에는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현지를 방문해 ‘인구비례에 의한 연방정부 구성’을 골자로 하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2004년 4월, 주민투표가 치러졌으나 남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렇지만 통일을 위한 양측의 회담은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다.

▲ 한국군 파병과 역할

 사이프러스에 파병된 한국군은 2002년 2월, 평화유지군사령관으로 부임한 황진하 예비역 중장이 유일하다. 분쟁지역에서 평화유지군사령관은 병력을 제공한 국가의 장성이 맡는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까지 한국군 장성이 UN평화유지군 또는 다국적군사령관을 역임한 사례는 황진하 장군과 함께 인도·파키스탄의 정전감시단장을 역임한 안충준 장군(예비역 소장·1997. 3~1998. 3)과 김문화 장군(예비역 소장 · 2008. 11~2010. 11), 소말리아 해역에서 다국적 연합해군부대 CTF-151의 단장을 역임한 이범림 소장(당시 준장 · 2010. 4~8) 등이다. 그러나 황 장군을 제외한 세 명의 사령관은 모두 파병된 한국군을 포함해 지휘했다. 따라서 한국군이 단 1명도 파병되지 않았던 사이프러스 평화유지군 사령관을 황 장군이 수행하게 된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999년 7월, 주미 국방무관으로 부임했던 황진하 장군은 당시 동티모르 사태가 국제적인 문제로 부각되면서 UN과 한국의 평화유지군 파병을 위한 국제적인 여론조성에 기여했다. 그 후 유엔은 동티모르 평화유지군사령관의 임기가 만료된 타일랜드군 장성의 후임으로 황 장군을 추천받아 거의 확정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동티모르 대통령 구스마오의 의견을 받아들여 또 다시 타일랜드군 장성을 사령관으로 연이어 임명하면서 황 장군의 사령관 기용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 후 황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유엔은 그 대안으로 사이프러스사령관에 보임하게 된 것이다.

 황 장군의 사례를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한국군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언어와 문화 등이 전혀 다른 동양인이 서양인 위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사령관 직책을 훌륭히 완수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이며, 초급간부들에게 롤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부사하라 선거감시단 파병

무장세력 `폴리사리오'-모로코 정전협정 감시

서부사하라의 무장세력 폴리사리오와 모로코군이 대치하고 있는 접경지역의 정전감시초소(팀사이트)로 이동하던 중 모래
에 빠진 차량을 구난하는 유엔 요원.

▲ 분쟁 개요

 서부사하라에서 독립을 추구하는 무장세력 ‘폴리사리오(Polisario)’가 이 지역을 병합하려는 모로코에 맞서 벌이고 있는 분쟁 상황과 한국군 의료지원단 파병 및 활약에 대해서는 본 연재 19회(지난 5월 17일자)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따라서 서부사하라의 분쟁 원인 및 배경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그 이후 상황만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2006년 5월 한국군 의료지원단의 철수 한 이후에도 서부사하라 사태의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 “모로코가 이주시킨 주민을 제외한 서부사하라 원주민에게만 투표자격을 부여해야 한다”는 폴리사리오의 주장이 바뀌지 않고 있다. 또한 “모로코의 주권 하에서 서부사하라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겠다”는 모로코 왕의 제안도 거부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국제사회 및 유엔이 아프리카단결기구 등 제3세계 국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폴리사리오를 제재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또한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친미국가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모로코와 국왕 하산 2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서부사하라 사태는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한 바 있다.

▲ 한국군 파병과 역할

 의료지원단 철수 3년 후인 2009년 7월, 한국은 유엔의 요청에 따라 곽성기·최현준 육군소령을 서부사하라 선거감시단의 옵서버(Observer)로 파병했다. 그들의 임무는 양측의 정전협정 위반 여부를 감시하는 것이다. 1년 단위의 파병이기 때문에 두 장교는 2010년 8월 귀국했다. 그들의 후임으로 2명의 장교가 파병되어 1년 단위로 교대하며 계속 근무하고 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 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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