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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대야성전투의 파급효과

기사입력 2011. 11. 02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7:20

김춘추 구출 `출사표'로 無名 노장 김유신 신라 구출할 `구세주'로

642년 8월 말 신라 왕경, 대야성에서 이미 죽은 줄로 알았던 극소수의 패잔병들이 귀향했다. 그곳에 자식과 남편을 보낸 어머니와 아내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산 자들의 증언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비참하게 갔는지 말해주었다. 그들의 입은 공포를 증폭했다.

 신라 조정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백제가 낙동강 서쪽의 합천지역은 물론이고 고령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백제가 낙동강을 건너 대구분지로 들어올 수 있는 확실한 발판이 마련됐다. 왕경인 경주가 지척인 대구다. 탁 트인 그곳에서 백제군을 막아낼 수 있는 자연지형물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신라의 대백제 방어 거점은 대구분지를 지나 경산까지 물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향후 경산에서 백제와 싸움이 벌어져 단 한 번 패배로 신라가 멸망으로 갈 것이다. 대책이 서지 않았다.

함벽루와 매봉산. 매봉산에 대야성이 있었다.

김춘추가 묻힌 무열왕릉과 4개의 대형 무덤이 있는 서악동 고분군의 전경. 김춘추와 그 가족들이 묻힌 곳으로 추정된다.
 뒤에 보이는 산이 김유신 동생의 꿈에도 등장하는 서악(西岳)이다.

 대야성 함락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있던 김춘추가 새롭게 등장한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을 만나 군사동맹을 이끌어 내겠다고 했다. 아무런 대안이 없던 늙은 선덕여왕과 고위 귀족들은 막연한 희망을 갖고 여기에 동조했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그곳에 가겠다는 김춘추를 보고 그들은 숙연해지기까지 했으리라. 당시 신라 조정은 당장 이러한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뭔가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신라의 일급 근친왕족이 고구려의 서슬이 퍼런 독재자를 찾아간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이벤트이기도 했다.

 이렇게 김춘추는 고구려에 갔다. 하지만 그는 기약한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던 여왕의 속이 하루하루 타들어갔고, 조정의 귀족 신료들 가운데 대야성 함락 책임을 놓고 김춘추를 비난했던 자들도 연민을 갖게 됐다.

 하지만 대책도 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는 형상이었다. 그때 김유신이 여왕에게 알현을 청했다. 어렵게 허락을 받은 그는 왕궁의 대전으로 들어갔다. 여왕은 김유신을 알아봤다. 구면은 아니었지만 어떤 잊지 못할 사건을 통해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625년 선덕여왕이 아직 공주이던 시절의 일이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친하게 지냈다. 유신의 집에 자주 놀러갔고, 그곳에서 유신의 누이를 보았다. 김춘추는 장대하고 매력 있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정력도 넘쳤다. 유신의 막내 여동생 문희는 그에게서 물씬 풍기는 남자의 향기를 느꼈다.

 둘은 눈이 맞았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얼마 후 문희의 배 속에 왕가의 아이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야합이었고, 왕실 조상신 앞에서 결혼의 의례를 하기 전에 출산을 한다면 아이는 사생아가 된다.

 어느 날 여왕이 왕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남산에 올라갔다. 어떤 대갓집 마당에서 큰 연기 기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분명 불이 난 것도 아닌데 누군가 장작더미를 집체같이 쌓고 불을 피웠다. 여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었다. 좌우의 사람들이 이르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라고 했다. 여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여왕이 되물었다. “누구의 소행이냐?” 이미 모든 사람들의 눈이 여왕 옆에 있는 김춘추에게 쏠렸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알아차린 여왕이 김춘추에게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김춘추는 말을 달려 김유신의 집에 찾아가 여왕의 말을 전해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혼례를 올렸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이렇게 처남과 매부 사이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자식의 생산으로 보자면 둘의 혼인은 왕가의 축복이었다. 근친혼에 눌려 생기를 잃은 신라왕족의 번식력이 색다른 가야 왕실의 혈통을 만나자 폭발했다.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 법민(문무왕), 인문, 문왕, 노차, 인태, 지경, 개원 7명의 아들과 지소(김유신 후처) 등 2명의 딸이 태어났고, 그들과 그 후손들이 통일기 중대 신라 최상층 지배세력이 되었다.

 여왕과 김유신의 대면은 세월을 느끼게 했다. 여왕은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늙고 허리 굽은 노파가 되어 있었다. 김유신도 47세로 당시 나이로 노인이었다. 그는 장성이 되지 못하고 퇴역을 앞둔 한 이름 없는 영관급 장교 신세 같았다. 13년 전인 629년에 포천의 낭비성을 함락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후에 공을 세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미래에 자신이 쓰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천관녀라는 기생을 만나 술로 젊은 나날을 보냈다.

 김유신이 여왕에게 말했다. “저는 춘추공이 떠나기 전에 기한 내에 돌아오지 못하면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라도 구해오겠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맹세했습니다. 길을 떠나는 춘추공은 저의 약속에 큰 위안을 받고 고구려로 향했습니다. 약속대로 저는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로 가야 합니다.”

 김유신은 여왕의 허락을 받고 1만의 군대를 일으켰다. 신라의 여왕은 물론이고 고위 귀족들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김유신을 주목했다. 김유신이 신라사회에서 이렇게 관심사가 된 적이 없었다. 김유신과 그의 병사들은 김춘추를 송환하지 않는 고구려 영토에 쳐들어가 단 한 명의 병사가 살아남을 때까지 싸우다 죽기로 한 결사대였다.

 김유신이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와 국경이 접한 지금의 서울 북쪽 부근에 도착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전투를 앞두고 김유신이 병사들에게 연설을 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이렇게 전한다.

 “내가 들으니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어려움을 당해 자신을 잊는 것은 열사의 뜻이라 한다. 무릇 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백 사람을 당해내고, 백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천 사람을 당해내며, 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만 사람을 당해낼 수 있으니 그러면 천하를 마음대로 주름잡을 수 있다. 지금 나라의 어진 재상(宰相 : 김춘추)이 다른 나라에 억류되어 있는데 두렵다고 하여 어려움을 당해 내지 않을 것인가?” 병사들이 대답했다. “비록 만 번 죽고 겨우 한 번 살 수 있는 곳에 가더라도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김유신은 뛰어난 지휘관이기 이전에 타고난 선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병사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 말해주고 그들이 치러야 할 싸움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는 병사들을 신뢰했고, 병사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목적을 이루게 하는 뭔가의 힘이 있었다.

 김유신 군대의 목적은 사신을 억류해 국제관례상 신의칙을 지키지 않은 고구려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런 사실은 고구려의 첩자들에게도 알려졌고, 고구려 보장왕에게 보고됐다. 연개소문과 보장왕의 입장에서도 사신으로 온 사람을 억류하고 잡아둔다는 것은 심적으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만성적인 전쟁상태지만 명분 없는 전쟁을 하기가 꺼려졌다. 김춘추의 감금을 풀었고, 후한 식사대접을 곁들인 환송을 해준 후 신라로 돌려보냈다.

 김춘추가 돌아오자 그를 구하기 위해 결전을 불사했던 김유신의 이름이 신라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 여왕은 그를 불러 백제군 방어를 위한 신라의 총사령부인 경산지역 사단장으로 임명했다. 신라가 위기에 처하자 모든 사람들이 능력 있는 무장의 등용을 원했다. 가야의 ‘개뼈’라고 그를 무시해 왔던 진골귀족들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뼈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백제군만 막으면 된다.

 직후에 김유신은 4위 관등 소판으로 상장군에 영전하는 고속 출세를 한다. 김유신을 신라 군부의 핵심에 올려놓은 것은 여왕도 김춘추도 진골귀족들도 아니었다. 대야성을 함락시켜 신라왕족들의 머리를 사비도성의 감옥 바닥에 묻은 의자왕이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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