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아름다운영웅김영옥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119·끝>연재를 끝내며

입력 2011. 06. 30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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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대령의 `정신적 유산' 계승·확대하자”


올해 美 최고 전쟁영웅 16명에 영옥 올라 우리 장병들 중 `제2의 김영옥’ 탄생 기대
사회봉사활동으로 한국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김영옥 대령 (2003년, 로스앤젤레스).

김영옥 대령이 6·25전쟁 때 야전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대대 차원에서 돌봤던 서울 경천애인사의 전쟁 고아들(1952년).

 국방일보를 통해 우리 국군 장병들과 김영옥 대령의 만남을 주선했던 지난 6개월은 그의 일대기가 저자의 입장에서는 특히 감회가 깊은 시간이었다.

 본인의 침묵과 겸손, 우리의 무관심이 어우러져 한국은 물론 재미동포 사회에서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던 한 퇴역 군인의 삶을 좇기 시작한 것이 1997년 2월이었으니 벌써 15년째로 접어들었다.

 김영옥 대령에 대한 취재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상식을 뛰어넘는 불세출의 전쟁영웅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취재를 위해 또는 감동에 젖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주위에 하기 시작하자 ‘미쳤다’는 얘기를 듣기 시작했고, 차츰 그런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날 때, 다른 한편으로는 “김영옥 대령이 남긴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고 확대하자”는 꿈을 공유하는 벗이자 동지들도 같이 늘어났다. 나이·성별·출신·직업·성향(정치적)·인종·국적을 뛰어넘어 이 같은 꿈을 함께하는 벗이자 동지들이 늘면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국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2003),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 서훈(2005), 한국 최고 무공훈장 추서 (2006), 미국 김영옥중학교 개교(2009),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개설(2010), 한국 초등학교 국어교과서 김영옥 대령 소개(2011).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 속에서 시작된 국방일보 연재가 종착역으로 다가서기 시작할 무렵 미국 포털사이트 엠에스앤닷컴(msn.com)은 올해 미국 현충일을 맞아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명을 선정하면서 김영옥 대령을 포함시킨 명단을 발표했다.

 독립전쟁의 영웅인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을 분단의 위기에서 건진 후 18대 대통령이 된 그랜트,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으로 34대 대통령이 돼 6·25전쟁의 포성을 멈추게 했던 아이젠하워,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았던 맥아더….

 사상 최대의 해전으로도 꼽히는 미드웨이 해전(1942년)에서 승리를 낚아 태평양전쟁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5성 제독인 니미츠 제독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한 그 명단에 유색인종으로는 김영옥 대령만 올라 있다.(하와이나 캘리포니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니미츠 고속도로’도 있다.)

 미국에서 미국 최고 전쟁영웅이란 단순히 전쟁에서 가장 용감하거나 유능했던 군인을 훨씬 뛰어넘는 각별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미국이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건국되는 과정에서, 남북전쟁이라는 분단의 위기를 극복하고 통일국가로 살아남는 과정에서, 국가적 명운을 걸고 싸웠던 양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현재의 미국이 있을 수 있도록 국가를 위해 최고의 공헌을 한 인물을 의미한다.

 미국이 전쟁영웅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 사람들이며, 그들이 있음으로써 인권도 복지도 존재할 수 있음을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웠기 때문에 오래도록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을 기억함으로써 전쟁을 기억하고 그를 통해 왜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나아가서는 어떻게 전쟁을 피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전쟁이 강요될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말로 위대한 군인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가 워낙 전쟁 대비를 잘해 적이 감히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함으로써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보호했으나 전쟁 자체가 없어 이름을 남길 기회도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럴듯한 얘기지만 실제로 인류 역사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중앙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에서는 국제전이든 내전이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 한국사 역시 6·25전쟁을 포함해 우리의 희망과 무관하게 강요된 크고 작은 전쟁들로 점철돼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냉정히 말하자면 우리가 원하든 아니든 한반도는 아직도 세계에서 전쟁 발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 가운데 하나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들 전쟁영웅들처럼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다.

 우리 국군 장병 한 명 한 명이 김영옥 대령 같은 군인들이 된다면 국군은 훗날 전쟁의 승리를 논할 필요도 없이 전쟁 자체를 막고 한반도를 평화통일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김영옥 대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되 반드시 한 가지만 해야 한다”고 할 경우 꼭 보여 주고 싶은 사진 한 장을 다시 게재하면서 연재를 마감하는 인사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그 사진은 그가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이나 한국 최고 무공훈장을 받는 사진도 아니고 6·25전쟁에서 그가 견인차가 돼 북상시켰던 전선 60㎞의 변화를 보여 주는 사진도 아니다.

 그 사진은 바로 이 지면에 게재된 사진인데, 그가 6·25전쟁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유색인종 야전대대장이 된 이듬해인 1952년 여름에 찍힌 것으로 사진에 등장하는 아동들은 그가 돌봤던 전쟁고아들이다. 그가 6·25전쟁 때 미 육군 규정상 한국전선 복무 기간의 꼭 2배인 18개월 동안 한국의 최전선을 지키며 함께했던 일이었다.

 고아원 경천애인사는 최고조에 달했을 때 고아 500여 명을 수용했다는데, 당시 32∼33세인 소령 김영옥이 돌봤던 그 고아들 다수가 훗날 화가·음악가·목사·교수·과학자·사업가 등으로 자라났다. 조금 더 아름다운 곳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님을 보여 주는 사진이다.

 군인은 각자의 계급과 위치에서 성실히 복무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국가와 국민에 헌신하는 것이고, 사실 그렇게 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또 언젠가 군복을 벗고 민간사회의 다른 직종에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도 가끔 고개를 옆이나 뒤로 돌려 다른 사람을 조금만 배려하고 반 발자국만 더 나아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신경을 쓴다면 우리 사회를 보다 아름답고 살 만한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마치 김영옥 대령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여도 된다면 “(미군들처럼) 군복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라”고 말하고 싶다.

 국군 장병들이 입고 있는 그 군복이야말로 우리 국민의 현재를 지키고 미래를 보호하는 명예로운 방패다. 오늘은 말할 것도 없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포함해 내일의 지속적 발전과 복지도 모두가 그 방패가 있음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면을 배정해 준 국방일보와 소중한 시간을 내서 이번 시리즈를 읽어 준 국군 장병들에게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리며 우리 국군 장병들 사이에서 ‘김영옥 대령’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한우성
재미언론인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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