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기억합니다!`군인' 김영옥을…
2005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거행된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레지옹도뇌르) 수여식 때의 김영옥. |
사실 김영옥 일대기는 훨씬 오래전에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필자가 그에 대해 취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999년 여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의회가 일제강점기 징용 및 성 노예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나 회사를 상대로 미국 법정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법을 제정했다.
기자로서 이 문제를 취재하다가 이런저런 실상을 알게 된 후 도저히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직접 개입하기로 마음먹은 필자는 김영옥을 찾아갔다.
그에게 이 문제를 상의하면서 “변호인단을 조직해 일본 정부와 일본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하는데 그렇게 되면 집필이 연기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즉석에서 “내 책보다 그 일이 훨씬 중요하니 집필을 중단하고 그 일에 매진하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징용 피해자 정재원 씨가 대표원고로 나서 1999년10월 일본 다이헤요 시멘트 회사(오노다 시멘트의 후신)를 상대로 징용 소송이 제기됐고, 한국·중국·대만·필리핀 국적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대표원고로 나서 2000년 9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하는 성 노예 소송이 제기됐다.
미국 법정에서 각각 제기한 이 대일 소송에는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갔고, 그러다 보니 그의 일대기 집필도 예상보다 몇 년이나 늦어졌다.
침묵과 겸손은 김영옥의 인품에 향기를 더하지만 취재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그는 결코 자기 이야기를 자랑하지 않았고 같은 주제를 놓고도 여러 차례 인터뷰하면서 질문을 퍼부어야 우연히 생각나듯 털어놓는 경우가 많았는데, 극적인 얘기일수록 더 그랬다. 진정한 전쟁영웅일수록 적나라한 전장의 모습을 되새기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필자가 알게 된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한 가지 편한 점도 있었다. 그에 대한 전기를 쓴다고 하자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 줬다는 점이다. 6·25전쟁 얘기라면 다시 하고 싶지 않다는 미군 31연대 2대대장(당시) 한 명만 빼고는 그랬다.
그의 사회봉사활동이야 보다 최근에 이뤄진 것이고 그가 관여한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남가주 곳곳에 뚜렷한 발자국이 남아 있어 이 취재는 쉬웠지만, 이미 60년이 넘은 2차대전이나 50년이 넘은 6·25전쟁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취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이란 극도의 혼돈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같은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이라도 전혀 기억이 없거나 기억이 있더라도 천차만별이었다.
미군은 혼란의 와중에도 철저한 전투 기록을 남기려 노력했기에 많은 도움이 되긴 했으나 기록에 있다고 모두가 사실인 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어떤 때는 기록의 허구성을 밝히는 것이 난제 중의 난제였다.
전쟁 부문에 관해서는 김영옥의 증언, 참전용사들의 증언·메모·회고록, 미군 각급 부대의 전투상보, 전장에서 발간됐던 해당 부대의 신문 같은 것이 일차적인 자료였고, 해당 전황을 다룬 신문·잡지·서적·논문과 전문가 증언 같은 것들이 부차적 자료였다.
최대한 현지답사 취재를 원칙으로 삼았으며 프랑스 보주산맥 전투나 한국 소양강 전투 같은 경우는 취재 후 미국으로 돌아와 글을 쓰다가 도저히 석연치 않아 할 수 없이 현장을 다시 찾기도 했다.
나는 전업작가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기에 사실취재에 입각한 엄정한 다큐멘터리를 쓰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연재는 철저한 실화로 등장인물이나 장소의 이름·시간·기상조건도 모두 실존인물 또는 사실이며, 대화 하나도 필자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어떤 부분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그런 것이 유난히 아쉬운 부분에서는 상상력을 동원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드럽지 않은 부분에 대해 좀 더 취재해 부드럽게 연결하는 것이 필자로서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모든 것을 취재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내놓은 것이었다.
취재 과정에서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
가장 도움을 많이 준 분들은 물론 2차대전이나 6·25전쟁에서 그와 함께 싸웠던 나이 많은 참전용사들이다. 이들은 나이 들고 불편한 몸에도 애써 시간을 내 기억을 더듬었고, 어떤 때는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인터뷰에도 흔쾌히 응해 줬다.
6·25전쟁 부문에는 육군의 이서영·박성우 장군과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김광수 교수로부터 참으로 값진 도움을 여러 차례 받았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6·25전쟁 부문을 정확히 취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밝혀 두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미국은 2차대전과 6·25전쟁이라는 2개 전쟁에 참전해 3개국에서 싸웠고, 그 3개국 모두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자국 군인에게 2등 훈장 1개, 3등 훈장 2개, 4등 훈장 2개 등 10개의 무공훈장을 줬지만, 아직도 김영옥에게 최고 무공훈장은 주지 않고 있다.
참전 후 50~60년 이상 지났으나 공훈을 재평가해서 주어진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과 그에 이은 한국 최고 무공훈장은 언젠가 미국 최고 무공훈장으로 이어질 것으로 믿으며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 이것은 이미 고인이 된 어떤 인물에게 단순히 무공훈장 하나가 더 주어지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 자체로서 원칙적 정의에 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특히 미국에서는 매우 중요한 민권에 대한 문제다.
김영옥의 이야기는 단순히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훈장을 달고 있는 어느 전쟁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군복을 벗은 후 어찌 살다 보니 그렇게 된 어느 사회봉사자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한국에 대해서는 해외동포는 과연 난파선에서 먼저 뛰어내리는 쥐새끼 같은 존재인가에 대한 답변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한국인은 국가의 위기나 발전 또는 지역사회봉사에는 무관심한 파렴치한인가에 대한 답변이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한미 관계나 한일 관계를 어떻게 가져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며, 영웅이 없다는 우리의 아쉬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김영옥은 영화·소설에나 있을 것 같은 용감하고 비상한 전쟁영웅이자 인간미 넘치는 인도주의자이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세계를 무대로 기상을 떨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자랑스러운 우리 선배인 실존인물이다.
오랜 시간 소중한 지면을 배정해 준 국방일보와 이번 연재를 위해 수고한 국방일보 관계자 및 그동안 이 연재를 읽어 준 국군장병 여러분 모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한우성 재미언론인 wshan416@stanford.ed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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