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이 지난후에도 왜 영옥에 매료되는가?
한국과 미국은 양국 관계에 대한 해석이나 어느 일방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앞으로도 오랫 |
함께 싸웠던 전우나 프랑스 산골의 노인들 말고도 필자를 놀라게 했던 사람은 많다.
김영옥은 2003년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으면서 “6·25전쟁 때 돌봤던 고아들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이 말이 보도됐을 때였다.
첫 전화는 한국에서 걸려 왔는데 “그분이 이제는 한국말을 거의 잊어버려 제가 대신 전화를 받습니다”라고 설명하자 수화기 저쪽의 여인은 흐느낌과 함께 사연을 털어놓으며 “꼭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를 반복했다. 이 전화를 시작으로 그야말로 미국 곳곳에서 또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그를 아는 사람을 만날 때의 놀라움보다 그를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의 놀라움이 더 큰 적도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건강정보센터는 연간 450만 달러가 넘는 예산을 집행하는 대형 저소득층 보건기구로 발전했으며, 미국 연방정부도 높이 인정하는 곳인데 이곳을 설립하고 발전의 토대를 닦은 이가 바로 김영옥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정확히 아는 이들은 극소수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침묵과 겸손 때문인데 캘리포니아에는 이처럼 그의 리더십 아래 태어나거나 성장한 비영리 사회봉사단체가 여럿 있다.
도대체 김영옥의 무엇이 50~60년이 지난 후에도 이들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가. 무엇이 그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김영옥을 취재하는 사람에 불과한 필자에게까지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가.
김영옥.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2월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동차로 50분쯤 달려 토렌스에 있는 그의 남루한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였다.
인사를 드린 후 필자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그의 삶을 책으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으나 그는 “책으로 쓰일 만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며 한사코 거부했다. 첫 인사를 드리고 청을 한 지 1시간이 지났다. 필자는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의 책상 건너편으로 두 손을 짚고 그를 향해 상체를 반쯤 구부린 상태였으니 상당히 엉거주춤한 자세였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떠납니다. 김 대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특히 한국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는데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들을 위해 큰일을 해 주십시오.”
그러자 책상 건너편에 앉아 있던 그는 필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더니 물었다.
“그 일이 무엇이오?”
“간단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신 이야기를 보다 많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순간적으로 아주 짧은 침묵에 잠기는가 싶더니 거침없이 말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시오.”
처음 만난 78세의 노인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얘기하는 무례함을 그는 탓하지 않았고 김영옥의 삶을 좇는 필자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필자에 앞서 여러 전업작가가 그의 자서전 집필을 제안했거나 관심을 두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는 일본에서 문학상을 받은 작가를 비롯해 유명작가들도 있었다. 다큐멘터리나 극영화 제의만 해도 50번 정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거부하다가 처음 만난 필자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필자는 기자로서 과분한 행운을 누렸지만, 그때만 해도 미국에서 한국어로 발행되는 소수계 언론사의 존재도 없는 기자였다. 비상한 두뇌와 예리한 통찰력의 소유자인 그는 지금도 한없이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당시 필자의 무례함을 뚫고 진실을 읽었던 것 같다.
필자가 그를 찾아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부모형제가 다 이민을 떠나는데 혼자 한국에서 살겠다며 한국 공군에서 군대생활도 두 번이나 했던 필자는 결국 이민 길에 올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되는 한국일보 기자가 됐다. 그로부터 4년째 되는 1992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흑인 폭동이 일어나 재미동포사회가 참담한 제물이 됐다.
미국 주류사회 언론은 재미동포들이 1달러도 안 되는 오렌지 주스 한 병을 훔친 흑인 소녀를 총으로 쏴 죽이는 무자비한 사람들로 그려 대면서 국가나 사회에 대한 봉사에는 무관심하고 제 뱃속 채우기만 급급한 이민자로 부각시키는 악의에 찬 기사들을 남발했다. 흑백 갈등의 분출구를 찾기 위해 힘없는 한국계 이민자들을 속죄양으로 삼은 것이다. 영어가 공용어인 사회에서 한글로 쓰는 기사의 한계가 더욱 크게 느껴졌고 미국 언론이 그려 대는 한국계의 이미지가 전체적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민해 보니 본국과 재외동포의 거리도 문제였다.
인구 밀도가 높은 한국은 이민을 장려했지만, 막상 재외동포에 대해서는 이중적 잣대를 적용하고 있었다. 이 같은 이중적 잣대의 부정적 시각이 가장 극단적인 예가 “이민자는 난파선에서 가장 먼저 뛰어내리는 쥐새끼 같은 존재”라는 발언이다. 이 발언은 한국의 대표적 작가가 그것도 유명 일간지를 통해 한 것이었다.
문화기자 시절 꽤 유명한 한국의 한 TV 방송작가를 인터뷰하면서 “왜 그렇게 한국 TV는 재미동포를 나쁘게 그리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사실 나도 그게 문제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해야 시청률이 오른다”는 것 아닌가.
본국과 재외동포의 거리가 멀수록 한국은 국가적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니 이 같은 현실의 수정도 필요한 일이었다.
한미 관계도 흔들거리고 있었다. 한국의 독립과 건국에서 6·25전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에는 분명히 공과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이나 어느 일방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두 나라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어떤 식으로든 깊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의사가 어떻든 세계는 한반도만 독존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두 나라의 관계는 상호존중에 뿌리를 둔 전향적인 것이 돼야 좋은데 그렇게 되려면 깊은 상호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도 미국을 정확히 알고 미국도 한국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한일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이 문제는 어찌 보면 한미 관계보다 더 복잡하고 해결책이 요원할지 모른다.
필자는 어찌 살다 보니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과거사 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 간단히 밝히자면 필자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미국에서 국제변호인단을 조직해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이 법정 투쟁은 7년을 끌었다. 징용 피해자 문제와 성 노예 피해자(소위 ‘일본군 위안부’) 문제다.
필자는 과거사 문제가 행동이 뒷받침되는 우리의 실천적 의지 위에 일본의 사과와 배상이 어우러져 깨끗이 청산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한일 관계가 언제나 과거에 맴돌고 있어서도 안 되며 이 문제 역시 상호 이해에 바탕을 둔 상호 존중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한우성 재미언론인 wshan416@stanford.edu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