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美최고 무공훈장을 못 받다니…
존 코백 미 육군중위(후에 대령 예편·오른쪽)가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방한복도 없이 북진에 참가했다가 중공군 참전 |
몇 년 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한국의 출판업자 한 분이 필자가 김영옥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물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필자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제게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제 아들이 그분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필자의 아들이, 딸이, 나아가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여러 나라에서 최고 훈장을 받은 전설적 영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같은 소망을 갖는 이유는 그가 불멸의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그것을 내세우지 않은 채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서 스스로를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됐고, 아직도 그 불은 한국·미국·유럽의 곳곳에서 빛을 발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 빛이 어디서 오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빛의 출처를 아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다. 김영옥의 전적지 취재를 위해 몇 년 전 보주산맥의 작은 마을 브뤼에르를 찾았을 때 만났던 촌로들도 그런 이들이다.
보주산맥은 프랑스 동북부에 있는 산악으로 동쪽으로 평원이 있고 일단 평원으로 내려서면 스트라스부르를 지나 곧바로 독일이다.
1944년 8월 파리를 탈환한 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독일로 진입하려고 공세를 조였고, 보주산맥은 연합군의 독일 진입을 막는 마지막 방어선이었기에 독일군도 사력을 다해 싸워 서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동양인 기자가 프랑스 산골에서 2차대전 취재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프랑스 산림청의 한 관리가 저녁을 함께하자며 자기 집으로 필자를 초대했다. 덕분에 필자는 평생 처음 프랑스인의 집에서 와인과 촛불이 곁들여진 정통 프랑스 가정요리를 맛볼 수 있었는데 식사에는 현지 노인들도 너덧 명 함께 초대됐다.
식사가 시작되면서 참석자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해 달라는 주인의 요청에 필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기자인데 2차대전 때 이곳에서 싸웠던 ‘꼴로넬 김’(프랑스어로 김 대령)이라는 한국계 미군을 취재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그가 ‘커널 김’(김 대령)으로 불리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도무지 영어가 통하지 않아 정말이지 쓰기 싫은 불어로 떠듬거리며 설명을 한다고 했으나 좌중은 잠잠했다. 혹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했던 필자는 이내 실망하면서 ‘어쩌면 내 불어를 못 알아듣는 것 아닐까? 그래도 명색이 불문학 전공이었는데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좀 더 해둘 걸…’ 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 당시 계급은 대위 아니었나. 그렇다면 혹시…?’ 그래서 설명을 바꿨다.
“2차대전 때 이곳에서 싸웠던 ‘까삐뗀 김’(김 대위)이라는 동양계 미군을 취재하러 왔습니다.”
필자의 입에서 ‘까삐뗀 김’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왼쪽에 앉아 정감 어린 눈길로 잠자코 설명을 듣던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나지막이 탄성을 질렀다.
“아, 까삐뗀 김!”
“그를 아십니까?”
놀란 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되묻는데, 미처 할머니가 대답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오른쪽에 앉아 있던 노인이 받았다.
“나도 어릴 때부터 그 이름을 듣고 자랐지.”
이탈리아 전적지 취재에서는 그의 부대조차 기억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어 이제는 시간이 너무 흘렀으려니 하면서 프랑스 취재에 나섰던 필자에게 그들의 기억은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자유를 찾아준 사람으로 기억하는 전쟁영웅 ‘까삐뗀 김’을 일본계로 알고 있었다.
브뤼에르에서 불과 수㎞ 떨어진 비퐁뗀이라는 보다 작은 마을은 당시 나치 치하에서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피를 흘렸던 연합군 장병 전체에 대한 감사의 상징으로 마을 성당의 현관 옆에 그의 이름을 넣은 작은 동판을 새겨 두고 있었다.
“100대대의 영웅 중 한 명인 까삐뗀 김영옥이 이 현관 왼쪽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가 치넨 씨와 함께 탈출했다.” 치넨은 당시 김영옥과 함께 탈출했던 위생병이다.
동판은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했다. 그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전장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전설로 남게 되는 1943~44년은 한국이 아직도 일제 치하에서 신음할 때다. 그 시절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가 연합군 청년장교가 돼 일본인 2세들을 이끌고 유럽을 무대로 기상을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 너덧 때였다.
나름대로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그의 족적을 더듬으면서 매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감동을 느낀 것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만이 아니었다.
그의 삶을 취재하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2차대전 때 그의 소대원으로 함께 싸웠던 일본계 2세 레이몬드 노사카 일병도, 6·25전쟁에서 그의 부하였던 아더 윌슨 대위나 존 코백 대령(당시 중위)도 그런 이들이다.
노사카 일병은 “함께 싸운 전우로서 김영옥이 미국 최고 무공훈장을 받지 못한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이내 눈물을 글썽이더니 “미국 정부는 제 정신이 아니다. 같이 싸웠던 우리한테 물어 봤어야지”하며 흐느꼈다. 그는 동생이 브뤼에르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고 조카(같은 동생의 아들)는 훗날 6·25전쟁에 참전한 인물이다.
윌슨 대위는 6·25전쟁에 참전한 백인으로 필자가 “김영옥의 삶을 책으로 쓰기 위해 인터뷰를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두 손을 모아 필자의 손을 잡더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윌슨 대위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말했다. “제발…, 그의 얘기를 훌륭히 써 주오.”
코백 대령은 헝가리계 이민 2세로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돼 나중에 김영옥 아래서 중대장을 지내고 훗날 월남전에도 다녀온 인물이다. 필자가 김영옥을 취재하기 위해 워싱턴에 간다고 하자 그는 공항까지 마중 나와 자기 집으로 데려가더니 부인이 손수 장만한 음식을 대접하고는 다음부터 어떤 일로든 워싱턴에 올 때는 자기 집에 머물라고 했다. 그 후 보충 취재를 위해 그의 집에 다시 가자 시집간 딸이 친정을 찾을 때 언제나 편히 자고 가도록 깨끗이 정돈해 둔 방을 침실로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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