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되돌아보는북한의도발

<4>해상에서의 도발

신인호

입력 2010. 12. 28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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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이후 서해 NLL<북방한계선> 의도적 침범


지난 2일 국회에서는 서해 5도 중 한 곳인 우도에 대한 북한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우도는 북한
의 함박도와 8㎞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연평도와 백령도를 잇는 통로와 근접해 있다.

1973년 가을,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전운(戰雲)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긴장감이 고조됐다. 북한은 이해 10월부터 11월까지 무려 43회에 걸쳐 서해 NLL을 의도적으로 침범했다. 해상에서는 전례가 없을 만큼 위협적이고 집중적이었다. 여기에 북한은 공군기까지 동원해 백령도 등을 위협했다.

 이때 인천에서 백령도로 가는 뱃길이 끊겨 군수품은 물론 생활필수품 등을 수송기로 실어 나르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태는 일촉즉발의 전면전 상태로까지 치닫다가 정전위원회를 통해 수습됐다. 이것이 이른바 ‘서해사태’ 또는 ‘서해 5도 봉쇄사태’다.

 북한은 휴전 이후 그때까지 해상에서의 도발은 거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비록 67년 1월 19일 동해 북쪽 해상 북방한계선 근방에서 명태잡이를 하던 우리 어선을 보호해 남하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던 당포함(56함)을 해안포로 격침시킨 것을 비롯, 68년 1월 23일 미국 해군의 푸에블로함을 동해 공해상에서 납치, 70년 6월 5일 서해 연평도 해역에서 비무장 경계임무 중이던 해군 방송선 ‘I-2정(艇)’을 납치하는 도발을 일으켰지만 서해사태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이즈음 북한의 도발은 육·해·공과 민간 테러까지 전 범위에 걸쳐 있을 만큼 극에 달했던 상태이기도 했지만 이 가운데 해상에서의 도발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해상전력에 관한 것이다. 휴전 직후 북한의 해군력은 전력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미미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북방한계선의 설정에 이의 제기 없이 그후 묵종(默從)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북한은 구(舊)소련으로부터 스틱스(Styx) 함대함 미사일을 도입해 고속정에 탑재하는 등 해군력을 회복했다. 이때 북한은 아직 국산 함정이 한 척도 없고, 재래식 함포에 의존하던 우리 해군보다 해상전력에서 우위를 확보한 것으로 판단, 도발한 것이다.

 둘째는 북한이 이때 서해 NLL을 부정했다는 점이다. 서해사태와 관련해 73년 12월 1일 개최된 제346차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 북한 측은 우리 측을 아연케 하는 억지 주장을 폈다. 즉,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道界線) 북·서쪽의 해역은 북한의 연해(沿海)이며 서해 5개 도서에 출입하는 선박은 북측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74년에도 서해에서 어선 14척으로 NLL을 월선시켜 긴장을 고조시키려 했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우리 구축함·경비함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가운데 뒤로 물러서며 NLL과 관련된 목소리도 거둬들였다.

 그로부터 약 25년이 지난 90년대 말에 들어서 이 서해사태를 되새기게 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남북 평화 무드에 젖었던 99년 6월 15일 발생한 제1차 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의 제2연평해전이 그것이다.

 제1연평해전은 북한 함정 수십 척이 NLL을 넘어 우리 해군고속정에 포격을 가해 오자 우리 해군 2함대가 북한함정 2척을 침몰시키고, 2척은 대파시키며 북한해군 수십 명을 사상케 하는 전과를 얻은 전투이며, 제2연평해전은 북한함정의 기습포격 공격에 우리 해군 고속정 승조원 6명이 전사한 사건이다.

 이때, 1차 연평해전 직후인 99년 9월 북한은 경기도와 황해도의 중간선을 해상경계선이라고 선언했고, 이어 2000년 3월 23일에는 서해직항로라는 것을 설정하면서 5개 도서를 출입할 때는 북한의 승인을 받으라는 이른바 통항로 선언을 하게 된다. 여기서 70년대 서해사태와 90년대 연평해전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정치적으로 남북 평화 무드가 조성되고 있었고, 북한은 이런 빈틈을 타 서해 5도를 의도적으로 노렸다는 점이다.

 연평해전 후 북한은 우리의 의지를 떠보려는 듯 경비정으로 하여금 NLL을 침범시켰다. 2004년 7월14일과 11월 1일에는 해군이 월선 북 경비정을 향해 함포 및 경고사격을 해 퇴각시켰다. 그리고 5년 뒤인 2009년 11월 10일 또 한 차례 교전이 벌어진다. 북한 경비정 1척이 대청도 동쪽 6.3마일 NLL을 월선하면서 남북 해군 간 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대청해전이다. 하지만 2010년 들어 2건의 대형 도발사건이 벌어졌다. 3월 북한이 우리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을 어뢰로 공격, 격침시킨 데 이어 지난달 23일 연평도에 방사포 등 포격을 가해 온 것이다.

 70년대 초반 이후 현재까지 북한의 해상도발의 중심에는 서해 NLL과 백령도 등 서해 5도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북한의 도발이 예상되는 1번지 역시 서해 NLL과 서해 5도임이 분명하다.

 왜 서해 5도일까. 백령도와 대청도·소청도 그리고 연평도·우도 등 서해 5도의 위치를 보면, 북한의 옹진반도와 해주만 입구를 초승달 모양으로 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군의 입장에서 보면 인근 북한 해군과 공군의 활동을 파악하고 적의 기습을 조기에 제압할 수 있다.

 반면 북한으로서는 서해 5도가 ‘목 밑의 비수 또는 목구멍의 가시’ 같은 존재가 된다. 특히 남침 시, 기습적으로 수도권 서측방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편다든가 저공침투 작전을 전개할 때 서해 5도는 결정적 장애요인이 되는 것이다.

신인호 기자 < idmz@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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