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그때그이야기

<1106>풍운의 별-142·끝-영원한 군인 `박정인'

입력 2010. 01. 29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5:17
0 댓글

박세직 향군회장으로부터 `향군 대휘장'을 받고 악수하고 있는 필자.                                                      <필자 제공>


나는 지금까지 140여 회에 걸쳐 지나온 나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았다. 일제 식민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1928년,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두 세기 동안 살아 온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은 내가 봐도 소설 같다.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부유한 가정에서 어려움 모르고 자란 나는 함흥학생 사건을 계기로 월남(越南)을 단행, 육사에 들어감으로써 군인으로서의 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었다. 임관 후 6·25 참전, 중공군 포로 및 탈출, 울산특경사령관, 33사단장, 실미도 사건, 자진 사퇴, 3사단장, GP에 대북(對北) 포사격, 보직해임 등 내가 걸어 온 군인의 길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 길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군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기에 포로가 됐을 때도 부끄럽거나 후회한 적이 없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압록강변의 혹한 속에서도 나는 세 번 만에 탈출에 성공, 육본으로 돌아와 다시 참전할 수 있었다. 그 후 연대장 시절에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군에 혹한기 훈련을 필수 교과목으로 보급시켰다. 나는 첫 번째 사단장 취임 두 달여 만에 실미도 사건이 터져 내 직속 상관과 부하들이 받게 될 징계를 내 한 몸으로 대체(代替)하려고 자진 사표를 던졌다. 그때도 나는 나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사단을 떠나던 날 나는 “명예는 상관에게,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나에게. 여러 장병의 무운장구를 빈다”라는 짧은 이임사를 남겼다.

 두 번째 사단장인 백골부대장 시절에는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북쪽에 맹포격을 퍼부었다고 해서 보직해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때도 난 나의 판단과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북한 공산당들은 약한 자에게는 강하지만 강한 자에게는 더없이 약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포격을 퍼붓는 동안 그들은 단 한 발의 포도 우리 쪽에 발사하지 못했었다.

 나는 대령시절 육군본부 군사처장을 역임한 데 이어 예편 후에는 전사(戰史)편찬위원장 등 군사(軍史) 분야에서 일한 덕분에 남다른 역사의식을 갖고 있다. ‘역사의 교훈을 존중하지 않는 민족은 멸망한다’는 것이 나의 평생 지론이요 철학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내 아들, 그리고 손자 등 3대가 군인가족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6·25 당시 빼앗긴 국토의 절반을 내가 되찾지 못했으니 내 아들이 나서야 하고, 아들이 못하면 손자가 나서야 할 것이기에 나는 3대가 군인의 길을 가도록 이끌었다.

 나는 10년 전부터 내 주변 분들에게 이색적인 연하장을 보내고 있다. ‘21세기 우리의 맹서’라는 제목의 연하장에서 나는 우리의 적(敵)을 셋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우리의 적’ 첫째는 바로 부정부패(不正腐敗)이고, 둘째는 친북 좌경세력이며, 셋째가 적화통일 북괴군이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우리의 국력을 쇠잔(衰殘)케 하는 가장 큰 주범은 바로 각계각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부패인 것이다. 그것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우리가 21세기 영광된 조국을 후손에게 넘겨줄 수가 없을 것이다.

3代가 군인의 길 걸어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나는 지난해 4월, 지금은 고인이 되신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박세직(朴世直) 당시 회장으로부터 영광스럽게도 ‘향군 대휘장(鄕軍大徽章)’을 받았었다. 나는 그것을 태극무공훈장보다 더 값진 훈장으로 여기고 있다. 80을 넘긴 나이에도 나는 ‘실지회복(失地回) 고강수복(故疆收)’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런 나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군인이다.

<박정인 전국방부전사편찬위원장·정리=김준범 언론인 balm88@naver.com>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