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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풍운의 별-140-투명·공정한 인사의 교훈

입력 2010. 01. 27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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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제9화


필자의 우국충정 정신을 웅변해 주고 있는 화랑도 5계.정의훈 기자 촬영

자신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채명신 회장은 지병이 악화되면서 한동안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채 회장 지병 악화로 입원

임기 말년에 회장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자 김학호(學浩) 육군 부회장이 병실로 채 회장을 찾아가 “차기 회장은 누가 됐든 6·25 참전자 중에서 골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건의를 했다. 그것은 당연한 얘기였다.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을 6·25 참전자가 아니면 누가 한다는 말인가? 그 말을 들은 채 회장은 “그 문제는 내게 맡겨 달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사무총장과 총무국장 등 측근 몇 명을 병원에 불러놓고 자신의 말을 받아 적도록 했었다.

이른바 구술서(口述書)라는 것을 작성케 한 것이다. 그렇게 작성된 구술서를 총무국장이 가져와 이사회에서 공개함으로써 채 회장의 뜻이 6·25 참전유공자회에 전달됐다.

 입원 중인 채 회장의 뜻이 담긴 구술서가 공개되기 전 유공자회 초미의 관심사는 차기 회장 문제에 모아져 있었다.

구술서의 가장 핵심은 차기 회장에 박희모(朴熹模) 당시 사무총장을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가 사무총장에 발탁됐을 때만 해도 내부에서는 ‘주위 사람들과 상의도 없이 그럴 수 있나…’ 하는 정도로 넘어갔었다. 하지만 그를 회장으로 추천한다는 데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이건 아닌데…’ 하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직의 장(長), 즉 CEO가 정상적인 집무를 할 수 없을 때는 그 다음 서열자가 회장 대리 근무를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당시 채 회장은 자신이 병석에 누워 정상적인 업무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대리 근무를 지정하지 않았었다. 그뿐만 아니라 후임 회장을 선정하는 문제도 구술서라는 편법을 써서 단독으로 특정인을 지명했다.

 그때 김학호 육군 부회장은 “6·25 참전도 하지 않은 신참 소대장을 어떻게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에 앉힐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으나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갑종 출신에 중장으로 예편한 그는 6·25가 끝나갈 무렵 겨우 소대장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6월부터 그 후 2년여 동안 중대장 이상 참전자 가운데 생존자들만 찾아봐도 그 수가 많았었다. 그런 그를 채 회장은 유재흥 전임 회장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차기 회장으로 지명해 버린 것이다.

당시 김학호 육군 부회장은 내게 ▲최영구(崔泳龜·육사7기·중장 예편) ▲이대용(李大鎔·육사7기·준장 예편) ▲박경석(朴敬錫·생도1기·준장 예편) 장군 등에게 조언해 달라고 자문했었다. 그들 3인은 채 장군과 절친한 사이인지라 그들로부터 좋은 어드바이스(Advice)를 기대한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채 회장이 지명한 사람이 과연 6·25 참전유공자회장으로 적합한지를 물어 보았다.

박 총장을 차기 회장 지명

 그러자 이들은 하나같이 “육사5기에서 10기까지 기라성 같은 참전노장(參戰將)들이 많은데…. 그러면 군의 위계질서가 흐트러져서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을 다 지켜 본 김학호 당시 사무총장은 훗날 내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사람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의 모습이 꼭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멀리서 보이는 그 사람의 이미지만으로 그를 평가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는 너무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직접 경험했습니다.”

<박정인 전국방부전사편찬위원장·정리=김준범 언론인 balm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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