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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기사입력 2009. 11. 30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5:07

토끼몰이'식 반복 수색 … 빛나는 전과

  6·25전쟁을 군사적인 승패가 아닌 명예로운 휴전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회담을 시작한(1951. 7. 10) 유엔과 공산 측은 1951년 11월 27일, 휴전조약이 30일 이내에 조인될 경우에 1951년 11월 23일부터 26일까지 양측 참모장교들이 작성한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한다는 데 합의했다. 양측은 30일간의 유예기간을 가진 휴전(休戰)에 합의한 셈이다.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한다는 원칙하에 양측이 임시 군사분계선에 합의할 기미를 보이자, 한국군과 미 8군은 전방의 2개 정규 사단을 투입해 후방의 공비를 토벌한다는 대담한 공비토벌 작전계획을 세우고, 당시 한국군 1군단장(백선엽 소장)을 지휘관으로 선정했다. ‘백(白) 야전전투사령부’로 명명된 토벌작전사령부는 수도사단(송요찬 준장)과 8사단(최영희 준장)을 기동타격부대로 선발하고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예하 모든 부대와 경찰부대를 통제해 남원에 사령부를 설치, 공비토벌작전(Op. Rat Killer)을 실시할 준비를 갖춰 나갔다.

 백 사령관은 참모장(김점곤 대령)이하 200여 명의 참모진을 구성하고 남원에 지휘소를 설치했고, 수도사단은 함정을 이용해 속초에서 여수, 8사단은 펀치볼(Punch Bowl)에서 차량 편으로 대전을 거쳐 작전지역에 도착하도록 했다. 11월 26일부로 서남지구전투사령부로부터 공비토벌 임무를 인수해 후방 주민을 괴롭히고 병참선을 위협하는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한 과감한 작전을 준비했다.

 백 야전전투사령관과 참모들은 4단계의 공비토벌 작전을 계획했다. 1단계는 1951년 12월 2일부터 10일까지로 지리산의 공비 거점을 공격하는 단계로 정한 반면, 12월 30일까지로 계획된 2단계는 경남과 전북 지역의 공비 거점을 공격하고, 3단계는 1952년 1월 30일까지 1, 2단계의 작전지역을 재수색하도록 했으며, 4단계는 잔적을 소탕하는 단계로 계획했다.

 지리산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공비를 3800여 명으로 추산한 백선엽 소장은 민심을 얻지 못하면 공비토벌 작전이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국민을 애호(愛好)하고 치안을 확보해 달라”는 부통령(김성수)의 간곡한 부탁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절대로 민폐(民弊)를 끼치지 말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백 야전사령부는 1951년 12월 2일 ‘토끼몰이’ 개념의 공비토벌 작전을 개시해 1952년 3월 14일 이를 마감했다. 8사단을 지리산 북쪽 남원·운봉·함양 지역, 수도사단을 지리산 남쪽 구례·하동·진주 지역에 투입해 1951년 12월 14일까지 실시한 1단계 작전에서 백 사령부는 공비 사살 1715명, 생포 1710명, 귀순 132명과 다량의 무기와 식량을 노획하는 전과를 기록했다.

 수도사단과 8사단을 지리산 주변 덕유산·운장산·내장산·백양산 등으로 분산된 공비를 토벌하도록 하고,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로 하여금 지리산의 잔당을 토벌하게 한 2단계 작전(1951. 12. 16~30) 종료까지 백 야전사령부는 4000여 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4000여 명의 공비를 생포하는 전과를 기록했다. 수도사단과 8사단을 지리산·백운산·덕유산에 동시 투입시켜 공비 잔당을 토벌한 3단계 작전(1952. 1. 4~30)에서 백 야전사령부는 김지회·이현상·이영회 등 많은 지도급 공비를 사살하고 생포하는 전과를 거뒀으며, 수도 사단과 서남지구 전투사령부가 실시한 4단계(1952. 2. 4~3. 14)에서는 주로 지리산 주변 고지의 소탕작전과 반복수색을 실시했다.

 공비토벌 작전에서 미군과 한국군의 과감한 결심이나 전폭적인 지원도 눈에 띄었으며, 이 작전에서 보여준 백선엽 사령관과 참모들의 판단과 구상은 높이 평가할 만했고, 이를 수행한 한국군 장병들의 기개 또한 매우 높았다. 공비들이 은폐나 엄폐할 수 없는 겨울에 작전을 수행한 미군과 한국군 지도부의 결심이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작전 자체가 성공하기 어렵다는 현지 사령관의 판단도 그렇고, ‘토끼몰이’식 반복수색 작전을 구상한 지휘관이나 참모들의 판단 역시 매우 적절했다. 추운 겨울 험준한 산악을 누비면서 작전을 수행한 장병들의 노고 역시 대단했다.

 이 토벌작전을 통해 한국군과 유엔군은 후방의 안전을 확보했고, 한국군은 전투력이 강화됐다. 특히 백 야전사령부는 발전적으로 해체돼 1952년 4월 5일부로 2군단으로 발족돼 수도·3·6사단을 배속받아 금성(金城) 지역에 투입됐고, 백 사령관은 중장(1952. 1. 20)으로 진급되는 개인적인 명예까지 주어졌다. 실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은 여러 면에서 명실공히 성공한 작전이었다.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전쟁사 전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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