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안보100대사건

<95>홍콩 반환

입력 2007. 12. 11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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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년 7월 1일 자정을 기해 155년간 영국에 할양돼 식민통치를 받아왔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됐다. 중국 대륙 동남쪽 해안에 위치한 홍콩은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기 이전까지는 주변 여러 어촌의 수산물 집합지였으며 광둥성(廣東省)으로 향하는 베트남산 향나무를 적치했던 조그마한 항구에 불과했다. 홍콩의 중국식 표기인 샹강(香港)은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19세기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은 중국과 어렵사리 교역을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심각한 무역 역조에 시달렸다. 그 이유는 독특한 향을 자랑하는 중국산 차(茶)가 영국 상류층의 입맛을 사로잡아 버렸기 때문이다.
    영국은 무역 역조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내다팔기 시작했다. 아편 무역은 단숨에 무역 역조를 반전시켰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영혼을 병들게 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안겨 줬다.
    급기야 청 왕조는 아편무역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리고 홍콩 등지에 들어와 있는 아편을 모두 수거,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 사건이 비화돼 일어난 전쟁이 바로 1840년부터 시작된 영국과 중국 간의 1차 아편전쟁이다.
    영국은 막강한 함대의 위력을 앞세워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난징조약을 강요, 홍콩을 중국으로부터 영구 할양받았다. 1차 전쟁으로 청조의 무력함을 알아차린 영국은 1856년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베이징까지 쳐들어가 청조를 굴복시키고 베이징 조약을 체결해 구룡반도와 스톤캐터스 섬을 추가로 할양받았다. 그리고 1898년에는 홍콩경계확장조약으로 주변의 신계지와 235개의 부속 도서를 99년간 조차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홍콩 섬 일대는 완전히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영국이 비록 부도덕한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을 강탈했지만 한적한 어촌이었던 이곳을 세계경제의 메카로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대영제국이 쇠퇴하고 중국이 부상하자 당시 중공정부는 홍콩 반환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홍콩이 난징조약으로 정식 할양받은 영토이므로 반환이 불가하고, 다만 조차된 구룡반도 일대만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무력을 앞세워 체결된 불평등조약의 결과였다는 중국의 항변에 영국은 홍콩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철의 여인 대처 총리도 지난날 대영제국이 무력을 앞세워 저지른 침탈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3년여의 협상 끝에 1984년 12월 대처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 자오쯔양(趙紫陽) 총리와 반환협정에 정식 서명, 97년 반환됐다.
    홍콩반환협정은 전문 12개 조와 부속문서로 돼 있는데 그 주요 골자는 ‘1997년 7월 1일 홍콩 전역을 중국에 반환하고 이곳에 특별 행정구를 설치한다. 중국은 1997년 이후 50년 동안 홍콩의 현 체제를 기본적으로 유지한다. 1997년 이후에도 외교·국방을 제외한 홍콩주민의 자치를 인정한다’ 등으로 돼 있는 1국 2체제의 정신을 담고 있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일국 양제’는 홍콩에 이어 포르투갈로부터 반환된 마카오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그리고 앞으로 대만 문제 해결에도 적용할 수 있어 중국인들의 인내와 실용주의가 돋보인다.
    결국 홍콩은 반환됐다. 그러나 홍콩이라는 자본주의의 꽃은 사회주의라는 박토 속에 홀로 피어 진한 향을 유감없이 내뿜고 있다. 시장경제가 이룩해 놓은 홍콩의 힘은 상전벽해를 이룬 상하이와 함께 거대 중국의 쌍두마차가 될 것으로 중국인들은 기대하고 있다.
    경우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 통일이라는 역사적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차근차근 통일에 접근하는 기다림과 함께 남북 공히 틀에 박힌 통일 방식에서 진일보해 새로운 타협점을 찾는 민족적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다.
    <김영이 군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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