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예비역단체를찾아서

<15>50동우회

글=김가영·사진=김태형

입력 2007. 06. 07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3:02
0 댓글
  • ‘임들은 나라의 부름을 입어/용약 창군하고 순국으로 침략을 막아/청사에 그 충의를 새기니/오늘은 겨레의 번영 내일은 조국의 통일을 보리라’.여류시인 김남조 씨가 노래한 이 추념시가 새겨진 곳은 국립서울현충원 안에 자리잡은 1950년도 현지임관 전사자 추념비. 이 비는 예비역 친목단체 ‘50동우회’가 건립을 적극 추진해 만든 것으로 동우회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예비역 친목단체 중 국립서울현충원 안에 이런 추념비를 갖고 있는 곳은 딱 두 단체. 그만큼 50동우회가 과거 우리 국군의 활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증거인 셈이다. 하지만 전사(戰史)를 공부했거나 군생활을 오래한 이가 아니라면 50동우회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50동우회는 1950년 6·25전쟁이 한창이던 전장에서 현지 임관한 장교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당초 조국 광복과 함께 창설된 국방경비대 일원으로 군문에 들어섰다.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방경비대가 정식 국군으로 발족하면서 동우회원들도 대한민국 국군의 일원이 됐다.

    50년 발발한 6·25전쟁은 동우회원들의 운명을 180도로 바꿔 놨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후퇴와 혼란 속에 극심한 전투손실을 입으면서 소부대 초급 지휘관이 절대적으로 모자라게 된 것이다. 초급 지휘관 보충이 발등의 불이 되면서 국방부는 사단장급 지휘관과 육군본부 감·국·실장의 추천을 받아 우수한 고급 하사관(현재의 부사관)과 준사관을 전선 현지에서 육군 소위로 바로 임관시켰다.

    당장 교육시켜 놓은 인원도, 교육시킬 인원도 없는 국방부로서는 이미 실무 지식을 익히고 실전 경험까지 갖춘 이들을 현지 임관시키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렇게 해서 50년 8월 30일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임관한 고급 하사관·준사관 출신 육군소위들이 바로 50동우회원들이다. 당시 임관한 인원은 전투병과 1932명, 지원병과 693명 등 총 2625명에 달했다.

    이들은 최일선 전투부대 소대장·중대장과 참모장교로 긴급 보직돼 초급 지휘관의 공백을 메우게 됐다.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기였던 만큼 이들은 소위 계급장을 달자마자 치열한 전투현장에 투입됐다. 6·25전쟁 당시 혈전이 벌어졌던 전장마다 전사자 명단에서 50동우회원들의 이름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휴전이 이뤄진 후 50년 임관자 중 전사자 377명·순직자 16명·실종자 700여 명 등 10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생존한 이들은 회원 모두 화랑무공훈장 이상의 훈장을 받는 역전의 용사들로 인정받았다. 휴전 이후에도 전후방에서 전후 복구사업과 부대 증설·정비·창설 등 전력 증강에 이바지했다. 국방경비대 창설 이후 6·25전쟁의 최일선에 나섰고 또 우리 국군의 기틀을 다진 50동우회원들.

    이 때문에 동우회원들은 스스로를 ‘국군의 뿌리’라고 말한다. 50년 임관자들의 유대강화와 상부상조를 위해 64년 5월 30일 발족한 50동우회는 첫 사업으로 6·25전쟁 중 장렬하게 산화한 동료 장교들의 전사·실종·부상 등을 파악했다. 이 과정에서 미처 유해를 처리하지 못한 전사자, 실종·행방불명돼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전우들을 위해 추모비 건립을 추진했다.

    국방부장관 승인을 받아 전우들의 정성 어린 성금 7500만 원으로 마침내 71년 8월 30일 국립서울현충원 내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또 98년 6월 25일에는 창군참전용사들의 각종 실전 전투 수기와 증언·기록들을 수집해 기록한 ‘국군의 뿌리-창군·참전용사들’ 2000부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전공을 세웠고 활발한 활동을 펼친 동우회지만 오늘날 상황은 허허롭기만 하다. 50년 당시 임관자 중 10% 수준인 271명만 생존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나마 평균 연령 80세로 대부분 전상 후유증과 노환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50동우회 연혁-최갑석 장군 주도 발족 14개 수도권·시·도 구성

    50동우회는 1950년 현지 임관 장교들의 유대강화와 상부상조를 위해 1964년 5월 30일 창설됐다. 이등병으로 군생활을 시작해 50년 소위로 임관, 장군이 된 것으로 유명한 최갑석 장군(당시 중령)의 주도 아래 동우 22명이 추진위원이 돼 모임을 발족했다.

    발기인이었던 최장군이 초대 회장을 맡았는데 이후 2대, 6대, 21대, 22대 회장을 맡으면서 최장군은 50동우회의 기틀을 다졌다.1950년 현지임관 전사자 추념비를 71년 건립한 것을 비롯해 50동우회원들의 발자취를 담은 ‘국군의 뿌리’를 98년 발간했다. 회장·고문·부회장·운영이사·임원 등이 14개 수도권 친목회, 6개 시·도지회로 구성된 동우회를 이끌고 있다.


    50동우회장 박재홍-“60만 대군 성장의 밑거름 자부”

    “6·25전쟁 당시 전투가 한창이던 최전선에서 현지 임관한 지 올해로 57주년이 됩니다. 벌써 60여 년이 흘렀지만 그날이 바로 어제인듯 생생하게 느껴지는군요.”현충일은 이틀 앞둔 지난 4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만난 50동우회장 박재홍(79) 예비역 대령은 그날의 감회가 되살아나는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우리 회원들은 국방경비대 시절 피끓는 애국심 하나로 자원 입대한 국군의 뿌리입니다. 고생도 참 많이 했지요. 창군 초기에는 일본군 패잔병들이 남기고 간 낡은 막사에서 99식·38식 소총을 메고 훈련을 받았죠. 모두가 못살던 시절이었지만 군은 특히나 모든 여건이 열악했습니다. 6·25전쟁에서는 최전선에서 소대장·중대장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값진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오늘날의 발전을 이뤘고 우리 군이 현재의 60만 대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자부합니다.”회원 중 마지막 현역이었던 최갑석 소장과 이명구 소장이 전역한 것이 20여 년 전인 1983년 10월. 세상을 떠나는 회원들이 점차 늘면서 모임 활동도 예전의 활력을 유지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최연소 회원이 78세, 최고령자가 87세입니다. 매년 5~10명 정도 회원이 감소하고 있지요. 5년 후면 50동우회의 명맥도 끊어질 형편입니다. 후대의 무관심도 섭섭하지만 해마다 줄고 있는 정부의 지원도 아쉽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좀먹는 세월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회원들의 애국심만은 어쩌지 못하나 보다. “비록 몸은 나이를 먹었지만 죽는 날까지 지난날 전선에서 부대원들을 지휘했던 그 용기를 바탕으로 제2의 안보역군으로서 국가보위를 튼튼히 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글=김가영·사진=김태형 기자 < kky71@dema.mil.kr >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