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베트남정글영웅

<47> 정태경 대위

입력 2006. 12. 13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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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태경 대위는 수도사단 기갑연대 6중대장으로 적진에 고립된 중대를 구출한 영웅이다. 1972년 3월 말, 북베트남군 1개 연대가 안케지역 638고지를 은밀히 점령한 후 4월 11일 새벽 안케고개를 차단했을 때였다. 기갑연대가 즉각 반격에 나섰지만 진척이 없었다. 연대장은 638고지 동남쪽 350고지에 6중대를 공중기동시켜 측방 공격을 병행키로 했다.13일 아침 헬기에 탑승한 6중대가 350고지에 착륙을 시작했다.

    3번기까지 순조롭게 착륙 후 4번기가 진입하자 적의 대공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7번기에 탑승했던 중대장 정태경 대위가 순서를 바꿔 빗발치는 탄우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 뒤를 이어 비상착륙이 계속됐으나 착륙 병력은 56명에 그쳤다.중대가 착륙한 곳은 남북으로 형성된 350고지 중앙 안부(鞍部)지역으로 적들은 양쪽 고지를 장악해 저지대에 위치한 중대를 위협했다. 3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정대위는 건십을 요청하면서 개인호를 구축하게 했다.

    악전고투 끝에 엉성한 진지가 만들어졌지만 불안감을 느낀 병사들은 무작정 사격을 계속했다.중대장이 ‘사격통제’를 외쳤지만 곧 실탄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날이 밝자 정대위는 두 개의 목표 중 보다 위협적인 북쪽고지를 공격하게 했다.3소대장 손창윤 중위가 지휘하는 특공조가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4시간 동안 격전이 계속됐지만 적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보급마저 두절된 가운데 또 다시 밤이 됐다. 적의 포격은 밤에도 계속됐다.

    다음날인 15일 아침부터 특공대의 공격은 계속됐다. 이번에는 남쪽고지에 대한 기만공격을 먼저 시작했다. 북쪽의 적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들이닥친 특공대의 습격에 혼비백산했다. 백병전으로 적 진지를 유린한 특공대는 진지 강화에 착수했다. 공격 중 두 명이 전사하고 중대장과 특공대장 등이 부상했다.부상자 후송과 재보급을 위한 헬기가 접근했으나 그때마다 적의 대공포가 작열했다. 수통의 물이 바닥나면서 갈증은 극에 달했다. 입술이 말라붙고 혀가 굳어져 가는 것 같았다.

    “물! 물을 달라!”는 병사들의 절규와 애원이 계속됐다. 부상자들은 갈증과 아픔을 참다못해 “빨리 죽게 총을 쏘아 달라”고 애원했다.그날부터 6중대를 구출하기 위한 5중대의 공격이 계속됐지만 적의 저항도 완강했다. 공격 3일째인 18일에는 105㎜ 탄약통에 담은 10통의 물이 보급됐다. 그때 갈증이 극에 달했던 병사들이 순간적으로 “물이다!”를 외치며 몰려들었다. 중대장이 M16소총을 발사하며 호 속으로 엄폐할 것을 외치고 있을 때 적의 포탄이 난무했다. 많은 병사와 함께 중대장이 쓰러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정대위는 무전으로 5중대장 안영소 대위를 불렀다. “결혼 100일 만에 떠나온 아내에게 자신은 ‘대한의 남아답게 용감히 싸우다가 안케계곡에서 전사했다’는 것을 전해 달라”고 부탁한 후 군가 ‘진짜사나이’를 불렀다. 중대원들도 따라 불렀다. 무선을 감청하던 지휘부 요원들도 눈시울을 적시며 결전 의지를 다졌다.

    필사즉생의 각오로 공격을 거듭한 5중대는 그날 저녁 6중대와 연결에 성공했다. 적진 고립 6일 만의 구출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 정부는 정태경 대위의 투혼을 높이 평가해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대위를 비롯한 안케의 영웅들을 청와대로 초청, 그 공로를 치하했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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